[사람 사람] 케냐의 나환자, 쪽방촌 노숙자 돌본 반평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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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어쨌든 상을 준다고 하니 기분은 좋네요. "

올해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된 유 루시아(75) 수녀. 17일 서울 양평동의 메리놀 수녀원에서 수상 소식을 들은 그는 '20년간의 아프리카 의료봉사'와 '7년간의 중국 교육봉사'를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했다.

1950년대 중반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에서 인턴을 시작할 때만 해도 유 수녀의 꿈은 다른 의대생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이 병원 설립자의 딸이자 한국전 미망인.고아들을 상대로 의료봉사를 하던 의사 헬렌 매킨지를 만나고 나서였다. "자기 나라도 아닌데 몸 바쳐 일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릿해 오더군요. 그때 선교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유 수녀는 그 후 산부인과 레지던트 수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 메리놀 수녀회로부터 케냐에 의료봉사를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젊은 나이의 그에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선뜻 받아들였다. 1965년 수녀가 되고나서 3년이 지난 뒤 케냐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겠느냐"고 회상했다.

케냐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참담했다.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양실조.폐병.설사병 등 미국에서는 보기 힘든 '후진국병' 환자들이었다. 나병 환자도 많았다. 전기도 없고 물도 부족한 곳에서 하루 300명 이상의 환자를 돌봐야 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50%가 넘는 유아 사망률이었다. 대부분의 산모가 아기를 낳은 뒤 더러운 칼로 탯줄을 잘랐기 때문에 많은 아기가 파상풍에 걸려 죽었다.

기약없이 떠났던 케냐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88년 귀국해 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있는 요셉의원에서 3년 6개월 동안 무료 진료를 했다. 이번엔 노숙자와 행려병자, 알코올 중독자들이 그의 환자였다. 그러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7년간 현지 의대에서 의학영어 등을 가르쳤고 지난해 귀국해 다시 요셉의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새로운 손님으로 추가됐다.

지난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냈다. 이 자서전은 현재 미국 메리놀 수녀원에서 수녀 지원자 교육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 수녀는 "지금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니라 생활"이라면서 "그러니 언제까지 하겠다는 기약은 없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령의료봉사상은 보령제약과 대한의사협회가 국내외 의료 취약지역에서 의술을 베푸는 의사나 단체에 주는 상으로 올해로 21회를 맞았다. 시상식은 21일 오후 6시30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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