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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며느리 불러들이는 가을 전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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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9면

몇 달 전 식당을 하게 된 이후 노량진 수산시장 장보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시장은 어디나 활기찬 에너지가 북적이는 곳이니 아침의 나른함을 깨기에 꽤 좋은 장소다. 게다가 시장을 돌다 보면 바쁜 일상에서 놓치고 있었던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요즘은 워낙 양식이나 냉동보관이 일반화 되어서 철 구분 없이 수산물을 즐길 수 있지만 여전히 제철에나 볼 수 있는 생선들이 있다. 기술이 좋아져 언제나 편리하게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건 혜택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더욱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 맛을 위해 과감히 투자를 아끼지 않는 ‘먹방’의 시대이다 보니 제철 진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끈질기게 이어졌던 더위가 한풀 꺾이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부터 수조에 전어가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전어가 더욱 반가웠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마침내 물러설 것임을, 그렇게 가을이 오고 있음을 작은 몸짓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전어는 가을을 대표하는 제철 생선이다.


계절을 대표하는 많은 제철 생선 가운데서도 전어는 가장 ‘스토리’가 풍성하다. 무명에서 주인공이 되기까지, 그리고 스토리의 반전까지, 스토리텔링시대에 꼭 맞는 생선이 아닌가 싶다.


생선회 인기 순위로만 따지자면 도미와 넙치(광어)가 수위를 차지하겠지만, 고급스런 생선의 대명사 참돔이 봄의 생선이며 넙치(광어)는 사실 가을에 가장 맛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가을생선 하면 전어를 쉽게 떠올린다.


전어가 가을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오랜 무명 시절을 견뎠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서해·남해 연안에서 많이 잡혔던 전어는 워낙 흔하고 싼 생선이어서 예전엔 그냥 버리거나 덤으로 거져 주었다고 한다. 상품가치가 없으니 도시의 횟집으로 팔려 나가기 보다는 바닷가 근처에서 먹고 끝내는 게 보통이었다. 생선회 애호가 중에는 아직도 “예전엔 전어는 공짜로 줬는데…” 라며 전어를 업신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전어는 결코 ‘듣보잡’ 어종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식생활과 친근한 생선이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나 서유구의 『난호어목지』 등 옛 서적에도 전어가 등장할 정도다. ‘귀천(貴賤)이 모두 좋아하고 그 맛이 좋아 사는 사람이 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고 기록돼 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온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전어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아마도 미식가를 위한 인기 만화 『식객』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을 전어 굽는 냄새로 마음을 돌리게하는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덧붙여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이 퍼지면서 자연스레 ‘전어=고소한 맛’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며느리를 불러 들이고 사람의 목숨을 구할 만큼 구수하다고 알려진 전어 굽는 냄새에도 반전은 있다. 이웃 일본에서는 전어 굽는 냄새가 시신을 화장하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하여 전어 먹기를 꺼렸다고 한다. 아마도 예전에는 냉장 보관이 어려워 싱싱한 상태로 보관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가늠해 볼 수 있다.


전어가 가을에 맛있는 것은 지방양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높으면 살의 고소한 맛이 더해지고 풍미도 올라간다. 숙성회 보다는 활어회를 즐기는 우리 식습관으로는 전어는 뼈째 썰어 된장·고추장을 섞어 만든 막장을 듬뿍 찍어 먹는 것을 즐긴다. 굳이 뼈가 씹히는 맛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포를 뜬 후에 다시마에 감싸 몇 시간 숙성해서 먹는 것이 살에 찰기가 더해지고 느끼함이 덜해 더욱 좋다. 회로 먹다가 물리면 깻잎·양파 등 야채와 초고추장을 넣고 무침으로 먹어도 감칠 맛난다. 물론 전어 맛 중 으뜸은 소금 뿌려 직화로 구워 먹는 것이지만 말이다.


가을 한철 전어는 횟집뿐 아니라 포장마차, 일반 식당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전어는 ‘촌놈’ 이미지처럼 우직하고 강건한 생선은 아니다. 오히려 반짝거리는 껍질과 비늘이 수조의 물과 만나면 스팽글 셔츠를 입은 것처럼 화려하기까지 하다. 가로로 길게 뻗어 나온 등지느러미는 요즘 유행하는 속눈썹을 붙인 것처럼 멋스럽다. 성질도 민감해 수조에서 오래 버티지를 못한다. 바꿔 말하면 오래 묵지를 못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짧은 가을이 후다닥 지나기 전에 전어 한 무더기 사다가 회로도 먹고 구워도 먹어야겠다. 가을 전어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의 땀냄새도 씻어내고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에 기름칠도 했으면 좋겠다. 전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먹으면 더욱 풍성한 식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지선㈜미친물고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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