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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혁임<서양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1·4 후퇴 후, 그러니까 1952년 2월 이든가 3월, 그때 미문화원 전시실에서 박생광 소품 동양화전이 있었고 그때 그 회장에서 이중섭을 처음 만났다.
나는 전부터 중섭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인인 「야마구치·가오루」 , 「무라노·마사마고도」등이 주관하는 일본초기 아방가르드적인 자유 미술회에 출품된 중섭의 작품 『소와 소녀』를 일본 미술잡지 「미즈에 아틀리에」에서 본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훤칠한 키에 짧은 코수염이 있는 미남이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갑자기 제주도로 가야한다며 황급히 떠났다.
그 후 나는 고향충무(그때는 통영)로 돌아왔다.
그때 충무에 나전칠기 강습소가 신설되면서 초대소장으로 유강렬이 오게 되었으며 강렬과 중섭은 일찌기 잘 아는 사이고 절친한 친구였다.
중섭의 처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떠났고 외톨이가 된 중섭은 강렬의 주선으로 충무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당시 먹고사는 문제는 강습소 강사로 있던 안용호씨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 충무 사람들의 주선으로 유강렬·이중섭·장윤성·나와 함께 4인 전을 가졌다. 중섭은 『분노한 소』 와 『충무풍경』 을 출품했다.
소를 그린 그림은 나의 친구 김모군이 갖게 되었으며 가격은 3천원으로 기억하고있다.
『분노한 소』는 그때 처음 발표되었다. 충무를 그린 풍경화에는 까치를 그린 것이 몇 점 있었다.
중섭은 분노한 소와 동자·동녀들의 유희나 동작을 에로틱하게 즐겨 그렸으며 종이나 은지(담배속)에도 열심히 수백점을 그렸다.
이때의 그림은 중섭이 충무를 떠나면서 김모군에게 보관케 했는데 그 후 그 그림들은 없어졌다.
그리고 중섭은 일본으로 가게된다. 밀항선을 타고 용케도 일본으로 가서 처자를 만났다는데 그 동안 2∼3년 밖에 되지 많았는데도 자식들과 이미 거리감이 생겼고, 「오아가디상」 (촌놈) 이라면서 서먹한 느낌을 받았다고 못내 섭섭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일본서 얻어 입고 온 베이지 색 양복을 자랑했다. 중섭은『한국에서 서적대금을 받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중섭의 친구가 일본에서 중섭의 처 주선으로 대량의 서적을 갖고 왔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정리되면 일본으로 가게 될 것 같다고 기뻐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하루는 나에게 부산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서적을 갖고 온 친구가 부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약간의 여비를 마련하여 같이 부산으로 갔다. 부산을 이 잡듯이 뒤져 용케도 보수동에서 그 집을 찾았다.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면서 그 집으로 들어간 중섭은 금방 나오면서 『수제비를 먹고 있더군.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서적 대금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조금도 섭섭해하거나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표정, 그 말씨가 어쩌면 그렇게 선할 수 있었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자신도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본성이 그렇게 착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으리라.
1953년 봄에 한묵씨가 충무에 놀러왔었다.
내 집에서 저녁을 대접하게 되었는데 나의 실수로 중섭을 초대하지 못했다.
하루는 술이 거나해 가지고 찾아와서 『한묵은 무엇이며 지독하게 고생하고 빵 한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중섭이는 왜 업신여기는가.』라면서 폭력으로 나를 대한 적이 있다. 설명하지 못한 나의 처지도 안타까왔지만 중섭에게 그런 일면도 있었던가 하고 새삼 생각해 보았다. 그 처절한 생활, 좌절감, 고독이 그를 정신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중섭이 충무를 떠나면서『그림으론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구차하게 살려고 힘쓰겠는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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