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내기 고장서 「약속의 땅」으로|새바람 부는 태백 광산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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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뜨내기 외상인생에 먹자판 위주로 살아가던 태백 광산촌에 새바람이 불고있다.
전국각지의 떠돌이들이 몰려 북적대다가는 훌쩍 떠나가 버려 「13도 공화국」으로까지 불렸던 이곳에 3∼4년 전부터 알뜰 저축바람이 일고 「고향심기 운동」 「본적 옮기기 운동」 등으로 주민들이 착실히 정착의 꿈을 가꿔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판잣집이 즐비하던 마을엔 점차 아파트·연립주택이 들어서고 동네 어귀마다 들어찼던 술집·고급살롱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아 이젠 목을 축이는 곳들만 몇 군데 남았다.
재형저축이 부쩍 늘면서 지난해엔 석공장성 광업소가 은 탑 저축 상을 수상하는 기적(?) 을 이뤘으며 주민 79%가 자녀들의 대학 진학을 희망, 4년 제 대학 유치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춤· 도박· 계 등 3악이 추방된 자리엔 절약과 문화·교육 열기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다.
침체의 이방지대였던 광산촌이 지역개발 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정착 노력으로 하루하루 「약속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알뜰 생활=『외상으로 우선 먹고 보자』던 먹자판 풍습은 옛말이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광원들의 술타령이 사라지고 박봉을 쪼개가며 저축을 하는 모습이 부쩍 늘었다.
석공 장성 광업소의 경우 5천6백 명 종사자의 저축액은 5월말 현재 자그마치 86억원. 한사람 평균 1백53만5천여원 꼴.
84년 36억원보다 1백40%가, 지난해 54억원 보다는 60%가 1년 새 늘어났고,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지난해엔 은탑 저축상을 받았으며 올해는 금탑수상까지 기대하게 됐다.
조기영 장성광업소 소장은 『광부들의 국민저축 가입수가 98%에 달하며 최근 들어서는 가계부를 작성하는 사람들도 늘고있다.』며 광원들 사이에 널리 퍼져 가는 절약정신을 자랑했다.
광원들의 이 같은 알뜰 생활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굿은 술집· 시중유흥가와 상가들.
한때 접대부 80여명을 고용, 서울 동대문 밖에선 제일 큰 술집이었다는 황지 D관은 3년 전부터 값비싼 양주와 맥주가 사라지고 소주와 밥을 파는 식당으로 격(?)을 낮춰야 했고 외상장사로 몇 곱을 남기는 등 대목을 즐기던 중앙시장 등 상가들은 요즘 비싼 물품은 아예 손님들이 찾지 않아 실용적이고 값싼 물건으로만 정찰 판매하는 업소들이 즐비해 졌다.
광원들의 알뜰 생활은 그 동안 광산촌에 뿌리깊게 도사려온 3악을 추방해보자는 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도박·춤·계 등 숱한 광원들의 보금자리를 하루아침에 파탄으로 몰아넣던 3악은 석공을 중심으로 추방운동이 시작됐다.
처음엔 위반자에게 인사징계 등 처벌을 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반발도 있었으나 요즘에 와선 모두가 광산촌의 고질적인 병폐였음을 깨닫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다.
◇주부 부업 바람=남편들이『잘 살아보자』 고 주먹을 불끈 쥐고 알뜰 생활에 나서자 주부들도 이에 질세라 부업전선에 나서는 등 팔을 걷어 붙였다.
석공 장성광업소의 경우15개 사택 단지별로 주부들에게 여가를 활용한 부업 장을 마련, 이들로 하여금 편물·수예 등을 통해 생계를 돕게 하고 있다.
석공 문곡 사택 촌 부업장의 경우 사택회관 2층 38평에선 주부 2백여명이 매일 모여 수출용 비즈 수예와 골프장갑 뜨개질에 구슬땀을 흘린다.
비단 천에 구슬로 모자이크하 듯 꽃무늬를 수놓은 비즈 수예는 중동 등지에서 주문이 밀려 처음 시작 땐 월 1천만원을 밑돌던 계약고가 지금은 6개월 작업량인 2억원어치를 미리 계약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주부들이 받는 임금은 하루 4시간 작업에 1인당 5천∼9천원.
초보자는 한달 20일 작업에 8만∼10만원. 숙련공은 15만∼20만 원씩 벌어 생활에 큰 보탬을 하고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부들은 비즈 수예가 끝나면 내수용 골프장갑 뜨개질까지 하는 사람도 흔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석공은 이와 함께 83년부터 주부들에게 갱도견학을 실시, 남편들 땀의 현장을 직접 보고 경험케 함으로써 남편들에 대한 주부들의 내조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문화활동=술· 도박대신 광원들의 취미활동도 건전해져 다른 직장인과 광부들이 함께 열을 올리는 연극단체도 생겨났고 각종 동호인 모임도 늘고있다.
석공 장성광업소의 경우 수석·사진·낚시·산악 등 동호인 서클 10여 개가 활동 중.
주부들을 위한 교양강좌도 자주 열린다.
주로 윤리·저축생활·자녀교육· 보건위생· 가정법률 등 8개 과목을 1회 1백80명씩 2∼3일 과정으로 교육하는 주부 교양강좌는 주부들의 큰 관심을 모아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교육일기=떠돌이 생활이 차츰 안정되면서 광원들의 교육열기도 차츰 뜨거워지고 있다.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지역인사들은 84년 6월27일 대학유치 추진위원회 (위원장 윤수근)를 발족, 이젠 대학유치는 태백시 최대의 현안문제가 됐다.
가칭 「태백대학」 의 4년제 대학유치를 위해 주민들은 3만4백평의 학교부지 가운데 1만5천9백평을 희사했는가 하면 청와대·국회·문교부 등에 건의, 현재 문교부에서 이를 검토중이다.
태백시 초·중·고교 학생 수는 현재 25개교에 4천9백70명. 이 가운데 진학 희망자는 79%인 3천9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높은 교육열을 보이고 있다.
◇본적 옮기기=태백시와 애향단체인 태백 동지회가 지역주민 화합을 위해 81년7월1일 시 승격과 함께 벌인 이 사업은 5년이 지난 지금 전체 인구 중 70%를 넘던 떠돌이 인생들 가운데 11%인 2천4백여 가구 1만2천5백여 명이 호적을 옮겨 태백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이병훈 태백시 시민과장은『고향심기 덕택으로 진정·투서·고발이 끊이지 않던 이곳에도 이웃과· 광부끼리의 동료애가 되살아나 불화가 훨씬 줄고 화목이 다져지고 있다.』고 말했다.
9월부터는 대대적인 호적 옮기기 가두 캠페인과 함께 지역개발 연구회도 발족할 계획이라는 것.
이와 함께 시도 토박이 공무원의 등용을 확대, 애향정신을 높이고 지역단체로 하여금 주민과 각급 학교 학생들이 애향나무 심기운동을 벌이게 할 방침이다.
◇지역개발=각종 지역개발 사업을 통해 광산촌 모습은 날로 변화되어 가고있다.
태백시의 주택 수는 2만1천8백여 채.
이중 아파트는 1천3백 채, 연립주택은 8천7백 채. 81년7월 시 승격 후 건립됐고, 91년까지 3천6백 채가 건립되면 주택보급률은 현재의 83%에서 96%로 늘게 된다.
주거환경이 종전의 판자촌에서 현대주택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의 생활풍습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고질적이었던 식수난은 광동댐이 건설되는 88년이면 완전 해소되고 도로망도 확충사업이 한창이어서 침체의 때를 벗을 날이 멀지 않았다.
박원기 태백시장은 『광산촌이 무지하고 척박하다는 인상을 지우려면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문화활동과 정서함양이 중요하다.』며 『광원들에게 산업전사의 자부심을 북돋워주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태백=권혁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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