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존경의 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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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67년 미국 시카고 43번 가에 있는 한 낡은 건물에 21명의 젊은 화가들이 벽화를 제작했다. 그것은 이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벽면에 우연적이고도 자연발생적으로 그려진 한 낙서 같은 그림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축제의 분위기에서 벽면을 모두 그림으로 채우게 된 것이다.
21명의 흑인 화가들은 저마다 다른 소재를 택하면서도 한결같이 이 지역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주제로 삼았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주민들은 이 벽화를 「존경의 벽」이라고 불렀다.
「존경의 벽」은 1971년 이 건물의 철거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지만, 그것은 미국 현대미술사의 엄청난 사건이 됐다. 「존경의 벽」 을 계기로 미국의 모든 지역사회에 이른바 주민벽화(Community Mural)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당국에 의해 계획되고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하여 그들이 적당한 벽면을 고르고 그림의 내용과 화가를 선택함으로써 그 동안 현대미술이 외면해 왔던 대중과의 만남을 대중 스스로가 획득해 낸 셈이 됐다.
어떤 마을에서는 「우리 고장의 영광」 이라는 주제로 이 지역 출신 유명인사의 집단적 초상을 그렸고, 어떤 마을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을 자못 도전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이리하여 60년대 후반 미국의 도시벽화 운동은 미국미술의 「문화혁명」 이라는 평가까지 받게됐고, 한편 뉴욕 시에서는 이것을 도시미화를 위한 환경벽화 (Urban Environmental Mural) 변용 시키면서 그 나름의 새로운 거리 미술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최근 신촌 역 옆 낡은 3층 건물에 그려진 「통일의 기쁨」 이라는 벽화가 당국에 의해 지워졌던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것이 한국판 「존경의 벽」의 수난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서울 시내의 모든 공사장에는 여러 가지 그림으로 담 장을 장식해 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런 그림들은 예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다. 「통」 만이 수난을 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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