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총선…왜 자민당이 압승했나|일본 젊은 세대 보수화가 큰 영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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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보수세력이 정치적으로 설땅을 마련하는데는 몇가지 상황적 조건이 늘 따라다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세력의 등장과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국내정치적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다. 보수세력의 정치권력은 이같은 도전과 혁신적 요구가 없이는 그 존재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정치사에서 배우고 지나온것 같다.
일본의 7·6 중·참의원 선거에서 보수정당 자민당이 압승한 것을 자세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중의원의석은 해산전보다 50석이 늘어난 3백석을 차지하게되었고 무소속 당선자 4명을 영입하면 5백12명가운데 3백4명의 하원의원을 확보하는 셈이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정당인 일본사회당은 해산전의 1백8석에서 85석으로 줄었고 민자당이 37석에서 26석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일본의 보수정당은 1960∼70년대에 강력했던 혁신당을 마침내 압승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저조현상은 1969년에도 있었다. 선거전의 1백41석에서 90석으로 51석을 잃은 적이 있는데 이때만해도 자민당이 1960년대부터 계속 저조해 보였고 야당의 다당화현상으로 공명당의 등장과 민자당의 확장세 때문에 보수세력에 대한 일반적 평가가 어려웠었다. 이같은 예상외의 혁신세력 퇴조현상은 정치의식 연구결과에 따르면 결국 투표율 저조현상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당시의 투표율 저조는 사회당을 이탈하는 많은 기권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목할만한 정치의식 연구결과를 살펴보면「지지정당 없음」이라고 답하는 유권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이는 과거 사회주의정당을 지지했던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화이트 칼러」계층이 많았고 일반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노출되었던 것은 당시의 사회구조나 경제사정으로 사회당에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1970년1월「사토」수상의 3차내각구성을 위한 국회소집에서 3백석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수상자신의 말마따나『「닉슨」대통령의 선물」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외교교섭으로 되찾게된 오키나와 반환의 성공이 그승리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회당에 불리할 이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가지 더 생각해볼 점은 당시 중공의 문화혁명 실패와 젊은 홍위병들의 권력투쟁, 67년10월「사또」수상의 월남을 포함한 동남아방문에 대한 하네다공항에서의 과격학생의 폭력적 투쟁, 69년1월 동경대학의 안전강당에서 학생농성에 8천명의 경찰력 대치사건등 학생반란, 그리고 68년8월 소련의「체코사건」으로 자유화·민주화의 탄압사건등 일련의 사건과 일본사회당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69년선거에서 많은 유권자가 사회주의정당 지지로부터 이탈했던 것은 특히 사회주의국가의 현실에 대한 환멸때문이었으며 일본이「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된 때문이었다. 결국 사회당의 득표율은 이후에 전과같은 20%이상을 만회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민당 압승과 사회주의 정당의 저조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의 중의원의원선거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후보자의 수·투표율·정책내용등이 선거결과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보면 자민당의 경우 후보자의 수를 가장 적절하게 제한했는데 반해 사회당과 민자당은 신인이 너무 많았고 투표율의 경우 경험적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까지는 투표율이 높을 경우 사회당에도 유리했으며 그 이후에는 자민당에만 유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자민당 지지에서 이탈했던 계층의 복귀를 의미하며 대체로 젊은 계층의 혁신정당 지지가 감소되는 현상이라 생각된다.
이같은 현상은 자유진영의 대부분 젊은 세대가 크게 보수화 경향에 빠져 있으며 특히 미국의 민주당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미 젊은 세대의 보수성을 감안하여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주장될 여러 정책이「카터」대통령때 보다는 훨씬 보수적인 대내외정책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70년대초반부터 중공이 변화를 가져오게 된것이 모든 나라의 젊은 계층에 크게 영향을 미친것 같으며 이 현상은 일본의 경우에 있어서도 현저한 것이다. 특히 인접한 사회주의 국가가 현대화과정을 통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볼때 일본의 사회주의적 노선은 많이 퇴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이시바시」위원장의「뉴사회당」노선을 내걸고 현실화정책을 추종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이념문제를 중시하고 정당의 조직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어 일본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만큼의 현실적 정책을 제시할수 없다. 결국「나카소네」정부가 내세운「전후정치의 총결산」으로서 교육개혁·국철혁신·세제개혁등 구체적인 정책대안에 반론을 제기했을뿐 사회당으로서의 정책대안이 궁핍했었다.
「이시바시」사회당의원장과「나카소네」자민당총재사이에 공개토론할 것에 합의한 항목을 보면 대부분이 외교·국방 그리고 국내정책가운데「내셔널리즘」의 제고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나카소네」수상의 지난 3년반 집권기간에 이룬 것을 점검하는 격이었다.「나카소네」특유의 지도자스타일은 다른 수상과 달리 직접 대중에 접근하는 경우이고 지도자 사이만의 타협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집권초기에 수상은 일본의 경제력을 가지고 국제적 공헌을 해야한다는 일본국민의「심리적 대외진출」을 자극했으며 경제대국으로부터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국제국가화」를 내세웠다.
이같은「개국의 자세」는 지난40년간 미국에 눌려살던 일본국민의 서글픈 마음을 만져줄수 있는 정책인 것이다.
물론 전전의 가치관의 부활을 우려하긴 하지만 현재 엔고의 마찰속에서 일본국민은 역시 자국의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또한번 강력한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외적 도전을 배제해보려는 국민적 표현과 승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정석<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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