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음복보다 수령福, 장군福 더 크게 생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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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14면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 축하 행사. [중앙포토]

북한의 명절은 국가명절(사회주의 명절)과 민속명절로 나뉜다. 국가명절은 김일성(4월 15일)과 김정일(2월 16일) 생일, 노동당(10월 10일)과 정권(9월 9일) 창건일 등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민속명절은 음력설·정월대보름·단오·추석 등이다. 북한에서 최대 명절은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이다. 북한은 1974년 4월 중앙인민위원회(당시 북한의 최고 지도기관) 정령을 통해 태양절을 북한 최대의 명절로 지정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74년 2월 후계자로 지명된 지 2개월 뒤였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 생일 준비를 대대적으로 하는 반면 추석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추석은 당일만 쉬지만 태양절은 보통 이틀을 쉰다. 주말이 끼면 3~4일을 쉰다. 태양절에는 각종 전시회와 체육대회, 노래 모임, 주체사상 토론회, 사적지 참관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추석은 민속적으로 전해오는 좋은 관습 정도로 보고 있다.


북한 당국은 추석 당일 남한의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대성산혁명열사릉과 신미리애국열사릉에 헌화하는 정도에 그친다. 지난해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박봉주 내각 총리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화환을 각각의 열사릉에 진정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추석이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고상한 정신적 풍모와 정서, 민속풍습에 맞게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추석은 무늬만 명절인 셈이다.


추석엔 선물세트는커녕 특별배급도 없다. 선물이나 특별배급은 태양절과 김정일의 생일인 광명절에만 제공된다. 인민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북한에서는 조상의 음복보다 수령복·장군복을 더 크게 생각한다. 수령복·장군복은 김일성(수령)과 김정일(장군)이 주는 복(福)을 말한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추석이 주는 의미가 남아 있다. 함경북도 청진시 청진화장품 공장에 근무했던 최정원씨는 “추석이 가족·친척들과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고 하루 정도 지친 삶을 쉬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석만큼은 ‘배부를 수 있는 날’이다. 북한 여성들도 이날만큼은 ‘음식 냄새를 풍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음식을 최대한 많이 장만하려고 한다. 이런 와중에 남편들은 뒷짐을 지기 일쑤다. 북한은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어 남편이 팔을 걷어붙이고 요리나 설거지를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추석에 기름진 음식을 갑작스레 많이 먹어 체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소화제는 추석의 필수품이 됐다. 최씨는 “추석에 만들 음식이 많고 넘칠 정도로 풍족해 일거리가 많아지면 더 행복하죠”라며 “가족·친척들에게 맛있는 것을 더 먹이고 싶어도 마음같이 되지 않는 것이 더 아팠다”고 말했다.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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