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4)「실패한 도?」2부|흐지부지된 부총리의 사임약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여당이 낸 부종리 해임안은 대통령과 당의장의 합의를 받아들여 폐기한다 그 얘기.
청와대를 나온 나는 즉시 의원총회를 열어 총재의 뜻을 전했어. 『지금 추진중인 한일회담과 경제개발 계획을 성취하는데 있어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장기영이 맡아야 할 역할이 크다고 한다. 그러니 총재의 의도를 존중해 이번만은 부결하는게 좋겠다』고 했지.
그러나 의원들이 나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아. 『장부총리가 지나치게 독단한다. 지금 제지 안하면 공화당은 경제정책에서 완전히 들러리가 되고 만다』그러는거야. 공화당의원 중에는 장부총리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말을 안하고 퇴진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분위기를 제압해. 그래 1시간 반동안 나는 여러차례 일어나 설득을 했지.
『여러분 심경은 이해한다. 그러나 한일회담을 마무리 짓는 중대한 정치적 고비이니만큼 총재의 의도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동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중대한 헌법상의 문제거나 기본정책과 관계되는 문제라면 내가 이런 말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각료의 인사문제이니 내 의견을 참고해 달라. 여러분들이 해임안을 가결한다면 총재의 의도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되니 기권을 해달라. 총재의 뜻에 따라 가결시키지는 않지만 부결시킬수는 없어 기권해 폐기시킨다. 물론 폐기는 효과면에서 부결과 같지만 정치적 의미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점을 내가 대통령께 설명해 적절한 시기에 대통령이나 장부총리 스스로가 여러분의 뜻을 존중하는 결단을 내리도록 하겠다.
의원들은 나의 타협안을 받아들였어. 그 결과 해임안의 국회표결은 재석1백25중 찬성 59·반대18·기권 65표로 폐기되었지. 이 표결 결과는 야당이 전원 찬성하고 공화당은 18명의 의원만이 반대하고 나머지 65명은 찬성이지만 행동만은 유보한 셈이지.
표결이 끝나고 오후에 청와대에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의원총회에서 장부총리 해임안은 일단폐기시키지만 각하께 진언을 해서 적당한 시기 장부총리를 물러나게 하겠다는 약속을 내가 했다고 설명했지.
-내가 의원총회에서 행한 약속이 실천되도록 대통령께서 조치해 주십시오. 장부총리가 수완있는 사람이라서 일을 잘 하는지는 몰라도 외부에 알려진 소문들이 좋지 않습니다.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내일이 아니라도 좋으니 시간을 두고 후임자를 물색해서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튿날인 26일 아침 장부총리가 반도호텔의 내 사무실로 찾아와 근 2시간동안 자신의 심경을 얘기하더군.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며 소신이며 그런거야. 그래 내가 『해임안은 가결되는 것인데 내가 적당한 시기 장부총리가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해임안에 대한 65표의 기권표는 나의 약속을 믿은 사실상의 찬성표다.
이런 과정을 알고 장부총리 스스로 민의를 존중하는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민의에 따라 깨끗이 물러난다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며 정치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고 페어플레이라고 믿는다.』
그랬더니 장부총리도 『잘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갔어. 그랬는데 이튿날 다시 나를 찾아왔어.
-선생님 말씀 듣고 물러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다만 퇴진시기는 2∼3일 더 기다려 결정을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요.
-다른것이 아니고 한일회담이 지금 고비에 이르러 있습니다. 한일수교조약이 가조인되면 곧바로 국무회의를 소집해 논의해야 합니다. 저도 한일회담을 추진해 온 한사람으로서 이 조약에 찬성발언을 하고 회의록에 서명해야겠습니다. 그 안을 끝낸 뒤 즉시 사임원을 제출하겠습니다.
-그것 좋은 얘기요.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추진해온 중요한 일을 결말짓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니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얘기는 쉽게 결말이 났어. 그런데 선뜻 일어서지 않고 머뭇거려. 나는 단순한 사람이니까 장부총리의 결심을 찬양했지. 정치인은 담백하고 신뢰를 선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야. 『장부총리! 이런 저런 생각 말고 결심을 굳혀 정리를 하시오.』
그랬더니 딴소리를 해. 어째서 그날도 역시 2시간 넘게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어. 자꾸 얘기가 왔다갔다 해. 결국 내가 밖에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 달라고 해서야 그는 돌아갔어.
그러니까 한일수교조약이 가조인 된후 물러난다는 약속이고 가조인은 3월말로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1∼2주일 사이에 처리가 끝나겠거니 했지.
그랬는데 가조인이 예정대로 되지않아. 다른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어로구역의 공동규제구역과 그 구역의 불법어로에 대한 규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아. 이 문제는 이승만대통령이 선언해놓은 평화선과 관계되는 아주 어려운 문제였어. 「평화선을 철폐하는 대신 두 나라의 독점적인 어로수역을 정하고 그 바깥쪽에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한다. 어족보호를 위해 공동어로구역은 상호규제한다. 그런 내용이 될텐데 이 규정에 따라 남획으로 규정되는 불법어로가 행해질때 그 규제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지. 일본은 기국주의를 제안했어. 글자 그대로 일본 국기를 달았으면 일본 법원이, 한국국기를 달았으면 한국법원이 처리한다는 게 기국주의야. 어로규제와 관련한 기국주의문제는 나에게는 생소한 분야였지만 내 상식으로는 이건 불만이야. 일본어선이 우리쪽 공동규제 수역안에 들어온 것도 기국주의로 한다면 일본어선의 남획을 일본재판소가 처벌하지 않으면 실효가 없게 되는 셈 아냐. 정부도 이점이 불만스러워 동의를 못하고 여러 날을 끌고 있었던 거야.
그런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던 때인데 4월4일 부산에서 지방유세가 있었어.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정일권총리·이효상국회의장하고 나하고 셋이서 한일수교의 필요성을 설명하도록 되어 있었어. 그래 부산에 내려가 있는데 아침에 기자들이 내 숙소로 왔어.
-한일수교조약이 가조인 되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문제의 기국주의는 어떻게 했다지.
-역시 일본측 제안대로 기국주의를 채택했다고 합니다.
-그건 유감인데 어떻게 하지…. 가조인이고 정식조인까지는 또 한두달 교섭이 있을테니 그 기간에 협상을 해서 기국주의로도 규제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보완조치를 하도록 노력해야지.
신문기자들에게 나는 그렇게만 얘기했어. 부산연설회에서도 같은 취지 얘기를 나는 했어.
『솔직이 말해 남획규제를 기국주의에 맡기는건 유감이다. 그러나 외교라는 것은 상대가 있고 평화선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
우리는 이승만대통령의 영단으로 이루어진 평화선을 지키고 싶다. 그렇지만 국교를 열어야 하고 그러자니 일방적인 선을 상대방과 합의한 선으로 바꾸어야 하니 공동어로구역이라는게 설정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로기술이 일본에 뒤진다. 그 사람들이 우수한 장비와 기술로 남획하는 일이 예상되는데 이를 막는 방책이 기국주의라니 불만스럽다. 어쩔수 없이 기국주의는 받아들이더라도 실효를 보장하는 보완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정식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므로 공화당이 책임을 지고 정부를 독려해서 보완조치가 추진되도록 하겠다.』이렇게 말을 했어.
지방유세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게 4월6일이야. 돌아왔더니 한일조약에 대한 국무회의 심의도 끝이 났어. 그러니 장부총리는 사표를 냈어야 돼. 그런데 깜깜 무소식이야.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렇다고 내가 장부총리를 불러 왜 약속한대로 사표를 내지 않느냐고 다그칠 수도 없어. 이 약속은 그와 나와의 비공식적인 얘기니까 신의의 문제지 내가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아니니 어찌하여 식언하느냐고 따질 성질의 약속은 아니야. 설혹 내가 그런 말을 한다해도 장부총리가 『그렇잖아도 대통령께 사의를 표했습니다만 승인하지 않아 사표를 못냅니다』라고 하면 나로선 할말이 없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