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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관서 전국 동화 구연대회|할아버지·할머니 옛이야기 들려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아, 옛날 어뜬 마을에서 열다섯살 먹은 아들을 놔두고 마누라가 죽었는디, 새로 얻은 마누라가 전실 자식을 죽일라고 매일 야밤이면 「나 죽겄소! 나 죽겄소!」해가며 배가 아프다고 뒹굴어 쌉니다.』새로 맞춰 입었음직한 비취색 끝동을 댄 옥색저고리와 비취색 치마를 차려입은 이순의 할머니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연신 팔을 휘둘러가며 얘기에 열심이다. 실내를 가득 메운 2백여명의 청중들은 노인·어린이 할것없이 할아버지·할머니가 들려주는 구수한 옛 얘기에 때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한국아동문학연구소와 3·1여성동지회가 공동주최한 제4회 전국 할아버지·할머니 동화구연대회가 열리고 있던 지난달 28일하오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3층 강당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가득차 마치 흥겨운 가족잔치한마당을 연상케 할 정도.
우중에도 불구하고 참가신청을 낸 23명의 할머니·할아버지 가운데 단 1명만이 불참했을 뿐 대전을 비롯한 지방참가자 8명도 전원 참석하는 열의를 보였다.
대전에서부터 올라온 조상국씨 (68·충남대전시중구목동15의21)는 부인 장민선씨(67)와 나란히 참가, 눈길을 끌었으며 대회 최고령자인 송시환씨(87·서울동대문구망우동444의16) 는 젊은이 못지 않은 낭랑한 음성으로 「신거미 장터 이야기」를 들려줘 장내를 감탄(?)시키기도 했다.
대부분 70대후반인 이들 참가자들이 들고 나온 동화는 주위에서 들었던 전래동화로 효나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것들. 그러나 어린이의 전화장난을 소재로 「여보세요, 큰별이에요」라는 창작동화를 직접 만들어낸 할머니(전보은·76·서울강남구대치동975의18) 도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평소 어린이들이 있으면 참견하고 싶어 그냥 못 지나친다는 김화순씨 (77·서울구로구 온수동 138) 는 『어린애들을 앞에 놓고 얘기하면 더 장 할텐데 다 큰 어른들 앞에서 하려니 좀 이상하다』 며 분위기조성(?)을 하려는 양 「나는 대한의 어린이외다」를 열창한 후 동화를 시작해 장내엔 웃음꽃이 만발.
『체험중의 하나를 이야기로 남기고 싶어서 참가했다』는 조상국씨는 식민지 시절 우리말이 없어졌던 당시의 어이없고 분했던 자신의 심정을 묘사한 「건국의 주춧돌」을 들려주는 도중 눈물을 글썽거려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대회주최측인 엄기원아동문학연구소장은 『국민들에게 경로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사라져가는 구전동화를 발굴·보전하려는 목적에서 해마다 이 대회를 열고 있다』고 그 취지를 설명하고 『노인들도 경로당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것보다 이같은 사회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생의 의욕을 높일 수 있으니 일석삼조』라고 강조.
7살·5살 두 딸과 함께 방청하러 온 김영숙씨 (35·서울종로구동숭동) 는 『핵가족 세대라 할머니들의 정감어린 옛날 얘기를 들려줄 수 없어 일부러 찾아왔다』고 말하고 『꾸밈없이 얘기하는 것에 무척 정다움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도서관에 왔다가 들렀다는 오선진양 (11·영등국교5년)은 『집에서 테이프로 얘기를 듣는것보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얘기하는 것이 훨씬 실감나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4시간 30분간 진행된 이날 대회에서 영예의 특상은「콩에는 왜 하얀줄이 있을까」를 구연한 김규열씨(76·서울동대문구 중화1동274의21) 가 수상했으며 최우수상은 윤정선씨 (70·서울강동구 상일동고덕아파트702동101호)·전보은씨가 각각 수상했다. <홍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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