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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사관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동경=최철주 특파원】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원폭 자료 관을 한바퀴 둘러본 한국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떫은 표정을 짓는다. 행여나 하고 기대했던 한국관계 자료가 전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 가운데 수만 명의 원폭희생자에 대해서는 전시된 자료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언급이 없다.『외국인에게도 피해가 있었다』는 한줄의 두리뭉수리한 표현이 고작이다. 한국인을「외국인」으로 대우했다 치더라도 희생자가 지극히 적다는 냄새를 풍기고 있다.
원폭투하의 참담한 피해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일본 중심으로 전시된 탓으로『미국이 너무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요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의『고교일본 사』제1차 수정 본을 읽어보면 한국은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자주성을 잃은 나라이며 중공문화를 전달하는 중계지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일본은 늘 옳고 강하다는 사상을 갖게 한다. 사 필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이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그들은 옛날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으로 여길 것이다.
수학여행 차 매일 수천 명씩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 들르는 일본학생들이 현장에서 일본 것만 보고 돌아간다면 누가 어디서 침략 받은 이민족의 아픔을 설명해줄 것인가 궁금하다.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63년 유네스코본부는 한일양국 역사교과서 기술의 불합리 점을 고치도록 중재에 나선 적이 있으나 일본사학자들의 끈질긴 반대로 유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전전의 황국사관도 80년대 전반기에 들어서 퇴색한 듯했으나 이번에는 우익 족에서 신화까지 동원, 역사를 미화시키는 새로운 교과서를 출판하려 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일 신시대 바람을 타고 양국간의 분위기도 적잖이 달라졌다.
그런 시기에 일본은 몇 차례 각료들의 신사참배를 시도했으며 한국은 늘 침묵을 지켰다. 일본이 한국과의 우호관계에 상처를 내는 사 필을 휘두르거나 행동을 할 때는 적절한 시기에 해야 할 말은 강도 있게 하고 넘어가는 것이 떳떳하다. 말하지 않으면 일본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슬 넘어가는 술책을 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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