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혜진, 비인기 설움 딛고 사이클 세계 랭킹 4위…조은수, 폭염 속 하루 5시간 스페셜올림픽 훈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한국 여자사이클 개척자 이혜진
고교 시절 세계주니어선수권 석권
리우선 한국 선수 첫 예선 통과
“후배들에게 희망 주는 선배 되고 싶어”

기사 이미지

한국 여자사이클 개척자 이혜진

“리우 올림픽 ? 출전은 했는데 제 시합을 생중계해 준 방송은 없었어요. 부모님도 이미 결과를 아신 뒤 재방송으로 제 경기를 보셨다고 하네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만 생각했다면 오늘 이 자리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사이클 역사상 첫 메달에 도전했으나 안타깝게 실패한 이혜진(24) 선수. 그는 한국 사이클계의 ‘개척자’로 통한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200m 스프린트와 500m 독주를 동시에 석권하며 이름을 날렸다. 한국 사이클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남녀를 통틀어 올림픽에서 단거리 예선을 최초 통과한 것도 그다.

특히 여자 200m 스프린트 부문에서는 스스로 세운 한국신기록을 2번이나 갈아 치우며 세계 4위의 자리에 올랐다. 각종 사이클 신기록을 세웠지만 이혜진 선수는 “한국에서 사이클 선수로 생활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비인기 종목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는 것이다. 우선 국내에는 국제경기 규격인 250m짜리 트랙을 가진 경기장조차 없다. 그나마 있는 낡은 경기장조차 대부분 시멘트로 지어져 훈련 중 넘어지면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할 정도의 부상도 다반사로 발생한다. 한국의 사이클 선수들이 제대로 된 훈련을 위해선 해외 전지훈련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다.

더욱 서러운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다. 국내 사이클 인구는 1200만 명에 달하지만 스포츠 경기로서 사이클을 즐기는 인구는 초라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혜진 선수는 국가대표 마크를 달고 안장 위에 오를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면서 후배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사 이미지

“하루는 훈련이 끝난 뒤 발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족저근막염이래요. 보통 이 병은 축구 선수나 마라톤 선수가 걸리는 거라 의사가 대뜸 마라톤 선수냐고 묻더라고요.”

음지에서 조용히 흘린 땀은 조금씩 빛을 발했다. 지난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스프린트 부문 은메달, 경륜 부문 금메달을 땄다. 7월에는 폴란드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여자 경륜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만은 끝까지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 불운이 이어졌다. 경륜 부문 예선 2차전에서 바로 앞서가던 콜롬비아 선수가 넘어지면서 이혜진 선수를 방해했다. 급히 진로를 바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다른 선수들은 다 앞서 나간 이후였다.

“순간적으로 모두 끝났다는 생각뿐이더라고요. 넘어진 선수에 대한 원망보다는 왜 더 앞서 다른 이들을 리드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뿐이었어요.”

2주 전 조용히 한국에 들어온 그는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올 10월 전국체전 준비를 위해 지난달 30일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사이클의 불모지라 불리는 한국이지만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박세리 골프 선수처럼 후배들에게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선배가 될 때까지 계속 도전하겠습니다.” 그는 또 “사이클이 모두의 관심을 끄는 일등 종목은 아니지만 세상이 전부 일등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잖냐”며 웃었다.

한국 대회 은메달 딴 조은수
선천성 지적장애로 내성적인 성격
“나도 열심히 하면 할 수 있구나
난생처음으로 뿌듯한 감동 느껴”

기사 이미지

한국 대회 은메달 딴 조은수

강원도 춘천 소양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은수(17)양은 올림픽 출전명단에 이름을 올린 고등학생 선수다. 은수양이 출전한 대회는 지난달 23~25일 서울 송파구 한국체육대학에서 열린 제12회 스페셜올림픽코리아 전국하계대회였다. 보체(공을 굴려 표적구에 가장 가깝게 붙이는 팀이 승리하는 게임) 종목에 출전한 은수양은 대회 출전 소감을 묻자 대뜸 “분하다”고 답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연습기간이 짧았고 훈련도 부족해 욕심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웠냐는 질문에 은수양은 “훈련할 때는 날씨가 너무 더워 투덜대기만 했는데 막상 경기에 지고 나니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고 말했다.

스페셜올림픽은 지적·자폐성 장애인들이 참가하는 스포츠 행사다. 패럴림픽과는 달리 기록과 순위를 두고 선수들끼리 경쟁하기보다는 장애인 선수 모두가 스포츠를 통해 화합하자는 취지로 열린다. 순위는 매기지만 ‘도전하는 모두가 승자’라는 슬로건에 따라 금·은·동메달 이외에도 4위 이하의 모든 선수에게 리본을 수여한다.

기사 이미지

은수양 또한 선천성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 내성적인 성격의 은수양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건 소양고 이미정(26)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특수체육교육학을 전공한 이 선생님은 지난 여름방학 기간 동안 직접 은수양을 훈련시키며 전후방에서 지원했다. 이 선생님은 “특히 장애인 학생들의 경우 스포츠를 통해 자신감과 자존감을 찾는 경우가 많다. 또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며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은수양은 여름방학 내내 찜통더위 속에서도 하루 5시간씩 스페셜올림픽을 대비한 훈련에 힘을 쏟았다. 가족과 친구들, 선생님의 응원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은수양은 올림픽에 출전해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장애인’이 아닌 ‘선수’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는 늘 장애인이란 점 하나 때문에 갖은 편견에 시달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은수양은 “내가 장애인이 되고 싶다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이유 없이 나를 놀리거나 불편해할 때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라는 생각을 했다”며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것 많고 꿈을 꾸는 보통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은수양이 이를 악물고 버티며 흘린 땀은 결과로 나타났다. 처음 도전해 본 보체 종목에서 당당히 조 2위 성적으로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경기를 지켜보던 학생과 선생님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은수양 또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뿌듯한 감동을 느꼈어요. 지금껏 무언가를 이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도전과 화합이라는 스포츠 정신도 절감했습니다.”

글=정진우·서준석 기자 사진=김춘식·김현동 기자 dino8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