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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할 게 없는 개발도상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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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기자 중앙일보 모바일서비스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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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디지털담당

#속도

이번에도 속도는 남부럽지 않다. 내년 정부 예산이 400조원을 넘어선다. 아직 정부 안이지만, 살림 규모는 해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200조원, 이명박 정부 때 300조원을 각각 넘어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100조원씩 나라 살림 규모를 키운 셈이다.

속도는 커지는 것만이 아니라 쪼그라드는 것에도 적용된다. 내년부터 잠재성장률은 3%가 허물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예측인데, LG경제연구원도 비슷한 전망을 했다. 10년 후면 2%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뭔가 무리수를 쓰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는 성장이 이 정도라는 얘기다. 두 속도를 함께 보면 이런 얘기가 된다. 씀씀이는 쑥쑥 늘어나는데 수입 증가 속도는 뒷걸음치고 있다. 그래서 의문스럽다. 400조원은 우리 분수에 맞는 예산인가.

#방향

내년 예산 400조원 중 3분의 1이 보건·복지·노동 분야에 쓰인다. 포퓰리즘이 있다 해도 이 분야에 나랏돈을 더 쓰는 건 틀리지 않은 방향이다. 저출산 완화에 힘을 쏟은 흔적이 보이는 것도 평가할 만하다. 인프라에서 복지로 예산 흐름을 바꾼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 전환이다.

흐름이 요지부동인 곳은 따로 있다. 썰물처럼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제조업이다. 제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2014년 18.5%였다. 평균치로는 우리보다 잘사는 일본을 뺨치는 수준이다. 자동차의 절반, 전자기기의 80%가 해외에서 만들어진다. 그 대신 고부가가치 산업이 유입됐다는 얘기는 가물에 콩 나듯 한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질문에 기획재정부 송언석 차관은 “인구구조가 바뀌면서 현행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복지 지출은 늘어난다”고 답했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문제는 복지 예산 증액의 방향성은 명확한데, ‘제조업 귀국’ 정책의 효과는 여전히 반신반의란 점이다. 가만히 둬도 늘어날 것이라는 보건·복지·노동 예산 소요를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가.

#좌표

세계 8위. 얼마 전 끝난 리우올림픽에서 한국 스포츠가 부여받은 좌표다. 경제도 엇비슷하다. 상반기 한국 수출은 세계 7위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20년 전에 됐다. 그러나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국이 금메달을 많이 따도 진정한 스포츠 강국이라고 봐주지 않는 것과 같다.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니까 한국의 진짜 좌표는 이미 ‘개발된(Developed)’ 나라가 아니다. 개발도상국일 뿐이다. ‘개발 중(Developing)’인 나라라면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무엇을 개발 중인가. 기존 산업은 포화여서 더 나아질 게 별로 없고, 신산업은 아직 싹이 노랗다. 창조의 깃발은 휘날렸는데 창조된 것은 별로 없다. 400조원짜리 수퍼예산 앞에서 다시 묻는다. 개발도상국인 한국이 개발 중인 것은 무엇인가.

김영훈 디지털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