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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본 몽고 재미 하만경교수 역사기행 독점연재<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4일 하오2시 나는 몽고외상의 권유를 받아들여 「칭기즈칸」의 고도 카라코룸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30인승 쌍발 프로펠러기였는데 50년대 소련이 만든 것이었다. 외무성 전용기로 쓰는 이 비행기에는 나 말고도 유네스코 직원 한사람과 동구에서 온 관리3명, 그리고 안내인·통역·쿠크등 모두 7명이었다.
외국인 여행단체에 쿠크가 타는 것은 몽고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찾아가는 곳에 변변한 식당이 없는 데다 순수한 몽고음식을 외국인이 며칠씩 먹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5천피트 정도의 낮은 고도로 그야말로 광활한 스테프지대 상공을 날아갔다. 촌락도 인가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철저한 풀의 바다가 눈 아래 끝없이 펼쳐졌다.
가끔 율레트가 서 있고 그 주위로 양떼와 말들이 몰려 있었다. 비행기 프로펠러의 소음이 심해서 옆 좌석 사람과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다.
한 시간쯤 갔을까? 비행기가 갑자기 하강을 시작했다. 내려다보니 끝없는 지평선위에 비행장이나 활주로 비슷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나는 비행기가 고장나 불시착하는 것이로구나하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야 초원에 갑자기 착륙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바퀴가 땅에 닿으면서 기체는 파도 타는 배처럼 심하게 요동했다. 풀밭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창 밖을 내다보니 한 떼의 소가 비행기의 전면에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땀의 기복 때문에 전복이 되든가 소 떼에 부닥쳐 전복될게 틀림없다는 위기감이 맥박을 뛰게 했다. 좌석을 잡고있는 손에는 땀이 괴었다.
그때 나는 미국과의 국교관계도 없는 몽고의 망망한 초원 가운데서 부상이나 당하면 보호를 요청할 곳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비행기는 소가 서있는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모두들 황급히 비행기에서 내렸더니 안내원이 다 왔다고 말했다. 그곳이 비행기 여행의 종착점이었다. 기가 막혔다.
주위를 둘러봐도 비행장 표시나 심지어 활주로의 방향표시조차 없었다. 이 길에 익숙한 조종사는 이 부근에 오면 아무데나 짐승들이 없는 지대를 골라 내리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쯤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또 한대의 비행기가 내렸다. 그것은 민간인을 태운 여객기였다. 비슷한 비행기였는데 전통 몽고 옷을 입은 사람들이 40여명 내렸다.
그들은 감자 꾸러미를 등에 진 사람, 양고기를 든 사람, 모피를 둘러맨 사람 등 꼭 시골 장터에서 오는 버스 승객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한참만에 버스 한대가 이 간이비행장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이 버스를 타고 그 부근에 있는 쿠지러트촌에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거대한 율레트였다.
이 율레트는 귀빈용으로, 입구에서부터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문에는 산뜻한 몽고식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에게는 그 안에서 털이 그대로 달린 양가죽을 덮어놓은 침대가 배정되었다.
밖에서 보기보다 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일반 가옥의 침실 못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그들이「만뚜」 라고 부르는 만두와 양고기·말고기·말고기 냉채 등으로 된 식사를 했다.
말고기 냉채 속에는 파·상치 등이 들어 있었는데 몽고인이 원래 채소를 별로 먹지 않기 때문에 이 채소는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 인 듯 했다. 여기 와서 확인한 것이지만 몽고인들은 서울에서 말하는 칭기즈칸 요리 같은 것을 먹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우리 는버스를 타고 도로도 닦여 있지 않고 도로표지도 없는 끝없는 초원길을 따라 카라코룸으로 떠났다. 그래도 운전사는 뭘 보고 방향을 잡는지 알 수 없지만 전혀 주저하는 기색 없이 잘 달렸다. 도중에는 야생토끼·노루·야크가 달리는 것이 가끔 보였고 특히 독수리가 엄청난 넓이의 날개를 자랑하며 버스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본 미국 서부 개척자들의 포장마차처럼 우리 버스는 광야를 달려나갔다. 버스길로 두 시간쯤 후에 우리는 드디어 14세기의 정복자 「칭기즈칸」의 도읍인 가라코룸에 도착했다.
카라코룸을 향해 떠나면서 내가 상상한 것은 물론 레닌그라드의 호화찬란한 고적이나 배경 자금성의 웅장한 모습은 아니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은 두 대륙의 곳곳에 왕국을 세우고 토성을 건축했지만 몽고 자체에 기념비적 건물을 세운 것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본 「칭기즈칸」의 유적은 너무 허술했다. 그가 살던 궁전은 잡초만 무성한가운데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남아있는 건물이라고는 에레데네수 사원과 그 부속건물 뿐이었다.
이 사원의 규모는 창덕궁의 4배 정도였는데 전성기에는 3만 명의 승려들이 살았다고 한다. 토대는 돌로 세워져 있고 건물은 우람한 나무를 깎아만든 것이었다.
몽고에는 나무가 별로 자라지 않기 때문에 목재는 시베리아에서 운반해온 것으로 보여진다.
유적은 모두 잡초에 싸여 있었다. 그 앞에는 안내판 하나 세워놓지 않고 있었고 안내인은 안내서 하나 갖고있지 않았다. 「킹기즈칸」의 유적이 이처럼 방치되어 있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유네스코였다.
10년 전부터 유네스코는 이 유적지의 보존사업계획을 세워 몽고정부에 권유했지만 아직까지 몽고정부로부터는 하등의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소련과의 관계에서 오는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도 아직 몽고정부는 이 유적을 본격적인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의도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생활수준은 낮지만 자급자족이 충분하고 소련으로부터 받는 원조도 상당액에 달해서 여유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일행은 이 역사적 유적이 잡초속에 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느끼면서 6일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7일에는 고비사막을 구경하러갔다. 극동지방을 휩쓰는 황사현상의 진원지인 이 사막에서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치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중도에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했다.
워낙 광활한데다가 모래바람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변두리만 돌다가 돌아왔다. 여기에는 야생 낙타와 산양·큰 독수리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낙타는 워낙 영리해서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잘 알고 도망가기 때문에 유럽 귀족들이 어려운 사냥대상으로 삼고 있다.
고비사막의 변두리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바람이 불어 모래를 실어가고 나면 새로운 유물들이 땅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비사막 변두리에는 조그만 천막을 치고 여기서 나온 유물을 파는 상점이 몇 개 있었다. 거기 진열된 유물은 주로 칼·화살·동으로 만든 병·여자용 브로치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고비사막 구경을 끝으로 몽고방문을 끝내고 북경행 기차에 올랐다. 몽고외상의 「인류학적」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몽고는 우리와 문화·말과 풍습 등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느껴졌고 몽고가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때묻지 않은 야성을 귀한 추억거리로 간직하고 나는 몽고에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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