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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노후’를 넘어, ‘마음의 노후’ 생각할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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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14면

어니스트 헤밍웨이

100세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예전보다 한층 더 심각한 노후 걱정을 부담으로 떠안게 되었다. 단지 늙고 병들고,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기 때문에 힘든 것만은 아니다. 은퇴로 인해 수입이 끊어지고 자식들도 모두 품을 떠났을지라도, 우리 마음은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젊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흰머리와 주름살은 늘어만 가는데, 무언가를 자꾸 원하고 꿈꾸고 갈망한다는 것이야말로, 노후라는 시기가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노후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쓸쓸하고 후회스럽다. 특히 ‘경제적 노후’를 대비하느라 ‘정신의 노후’를 돌볼 길 없는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집단적 공포의 대상이다. 동안(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유산 상속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일상화되어 가는 지금, 노후 생활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심리학적 과제라 할 수 있다. 평균 수명은 늘어만 가고, 장기 불황으로 인해 노인의 경제 활동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 품위 있는 노후, 존경받는 어른, 존엄을 지키는 말년이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며 나는 문득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떠올랐다. 조르바의 유목민적 삶의 노선도, 산티아고의 구도자적 삶의 노선도 결코 쉽지는 않다. 세상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가는 조르바의 인생은 감히 모방해 보기도 어려운 경지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왠지 우리 자신을 더 많이 닮은 것 같다. 산티아고는 끝까지 도전하고, 매번 실패한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만인의 영웅’은 아니지만 내 마음속의 진정한 영웅이다. 현대인의 쓸쓸하고 각박한 노후를 화두 삼아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은 한 인간의 비극적 실패담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늙어 가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 주는 소중한 마음 챙김의 텍스트로 다가왔다.

“젊음이 알 수만 있다면, 늙음이 할 수만 있다면”산티아고는 모두로부터 ‘한물간 퇴물 어부’로 취급당하지만, 소년만은 그를 최고의 어부라고 인정한다. 끼니를 챙겨주던 소년은 애처롭게 눈물 지을 뿐.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나간 산티아고는 드디어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를 발견한다. 평생 처음 보는, 실로 아름답고 커다란 청새치였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어구(漁具)에 체력까지 바닥난 산티아고는 혼자서 이 큰 물고기와 대적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에서 소년을 생각한다. “그 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애는 나를 도와줄 테고, 이런 멋진 구경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프랑스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젊음이 알 수만 있다면, 그리고 늙음이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늙음과 젊음의 공존은 사회 전체의 균형감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노인과 바다』에서 소년은 노인의 오랜 경험과 풍부한 지혜를 동경하고, 노인은 소년의 활달한 기상과 뛰어난 체력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산티아고는 벌써 몇 날 며칠 잠을 설치며 사투를 벌이면서도, 청새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커다란 역경을 견딜 수 있는지, 인간이 과연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싶었다. 고기가 엄청난 괴력으로 초라한 배를 뒤집어 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그는 얼마든지 승복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네가 나를 죽일 셈이로구나. 그래,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내 평생 너처럼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이 넘치는 고기를 본 적이 없거든. 네가 날 죽인다 해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아.” “형제여, 어서 와서 날 죽여 다오, 누가 죽든 이제는 상관없구나.” 바로 이런 생각을 할 때쯤, 노인이 던져 맞춘 작살이 고기의 배를 갈랐고, 거대한 청새치는 새하얀 배를 드러내고 은빛 바다 위에 누워 출렁인다.


그러나 이 눈부신 승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더 큰 곤경이 시작된다. 신선한 피 냄새를 맡은 상어떼들이 쫓아온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노인을 휘감는다. 이 고기가 단순한 노획물이 아니라 이제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인은 사력을 다해 상어 떼와 싸운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싶다. 상어에게 물어 뜯겨 엉망이 되어 버린 청새치를 바라보고 싶지가 않다. 그저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냈더라면 이토록 뼈아픈 상실감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그때 산티아고의 메마른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대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만한 일에 포기하지 않아. 인간은 넘어질 수는 있어도, 결코 무릎 꿇지는 않아.”


노인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상어의 누런 눈알에 마지막 칼을 내리꽂는다. 놈은 죽어 가면서도 물어뜯은 고기를 삼키고 있다. ‘이것이 생명이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다. 죽는 순간에도 결코 욕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고기는 거의 뼈만 남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실종된 줄 알고 구조대까지 출동시켰지만 그는 ‘무사히’ 돌아왔다. 살아 있으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으니까.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산티아고를 바라보며 소년은 하염없이 눈물 흘린다. 뼈만 남은 고기의 잔해. 그리고 껍질이 다 뜯어져 나가 생살이 드러난 노인의 앙상한 손만 보고도 소년은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산티아고를 비웃던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의 안부를 걱정한다. “코에서 꼬리까지 자그마치 18피트나 돼.” “정말 엄청난 고기야.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 모두 산티아고가 결코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눈부신 도전과 위대한 실패를 모두 인정하게 된 것이다.


기진맥진해 잠들어 있던 산티아고는 자신을 위해 커피를 가져온 소년을 본 순간 새로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바다 위의 거대한 싸움만 생각하다가, 자신이 하마터면 놓칠 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빼앗겼지만,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거대한 청새치보다도 더 커다란 생의 기쁨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소년과의 끈끈한 우정이었다. “얘야, 그동안 네가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아니.” 실로 오랜만에 산티아고는 평화롭게 잠들어 비로소 단꿈을 꾸기 시작한다.


‘내 마음 속 사자 한 마리’를 잃지 마시길 여기서 매우 결정적인 꿈의 상징이 등장한다. 산티아고는 초원을 내달리는 거대한 사자의 꿈을 반복해서 꾼다. 그 ‘거대한 사자의 이미지’야말로 산티아고가 주변의 온갖 멸시 속에서도 남몰래 간직해 온, ‘자신의 셀프 이미지’인 것이다. 그가 다시 초원을 달리는 사자의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자존감이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산티아고는 겉보기엔 초라한 독거노인이지만, 그 진정한 내면의 초상은 바로 초원을 달리는 거대한 사자인 것이다. 만선의 꿈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지만 노인이 ‘사자의 꿈’과 ‘소년의 우정’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내면의 진정한 성공담이기도 하다.


노인이 초원을 달리는 사자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아직 그가 영혼의 젊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숨은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심리학의 궁극적 과제다. 어떤 힘겨운 상황에서도 ‘내 마음속의 사자 한 마리’를 결코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음만은 결코 늙지 않는 최고의 비결이다. ●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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