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2016] 인비 8언더 치라고…할아버지는 8㎞를 걷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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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28·KB금융그룹)를 안은 할아버지 박병준(84)씨의 어깨가 떨렸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내 손녀가 이제 대한민국의 딸이 됐다”고 말했다. 손녀는 “할아버지 왜 우세요”라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드렸다. 23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금의환향한 박인비는 할아버지를 꼭 안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박씨는 위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2년 전 위 절반을 잘라낸 뒤 1년 전엔 나머지 반도 잘라냈다. 박씨는 그러나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인비 덕분에 나도 건강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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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한 박인비(오른쪽)와 금메달을 목에 건 할아버지 박병준 씨. [사진 JTBC골프 화면 캡처]

박씨는 손녀가 경기하는 날엔 경기도 분당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8㎞ 거리를 꼭 걸어서 다닌다. 자신이 4㎞를 걸으면 손녀가 4언더파를 치고, 8㎞를 걸으면 8언더파를 칠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암으로 위 절제한 84세 박병준 옹
경기 날은 꼭 걸어서 병원 왕복
“내 손녀가 대한민국 딸 됐다” 눈물
할아버지에게 금메달 건 박인비
“9월 에비앙 챔피언십 나가고 싶어”
첫 수퍼 골든 그랜드 슬램 욕심

최근 박씨의 건강은 예전만 못하다. 박인비가 올해 내내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서 그도 걷는 날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림픽 전초전 격이었던 이달초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박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틀간 36홀을 돌며 손녀를 응원했다. 박인비는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골프장의 산길을 걷는 할아버지를 보고 감동했다. 박인비가 나쁜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한 것도 할아버지의 응원 덕분인지도 모른다.

박씨는 8명의 손주를 뒀다. 박인비의 아버지 박건규(55)씨에 따르면 “아버님은 인비를 유달리 아낀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손녀와 함께 골프를 즐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인비가 초등학교 시절 골프대회에 나갈 때면 할아버지는 손녀를 따라다니며 경기를 지켜봤다. 박인비의 어머니 김성자(53)씨는 “그래서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가 남달리 각별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박인비의 빼어난 퍼트 실력은 할아버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박인비는 초등학교 시절 드라이버와 아이언샷은 아주 잘했는데 퍼트는 서툴렀다. 한 홀에서 4퍼트, 5퍼트를 하는 일이 수두룩했다. 할아버지 박씨는 손녀에게 퍼트 기술을 알려줬다. 2008년 박인비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할 때도 할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박인비가 부진하자 박씨는 “네가 LPGA투어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는 게 할아버지 마지막 소원이다. 우승하면 나도 똑같이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박인비는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

박씨는 193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뒤 생계를 위해 산에서 나무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박씨는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만 해도 우유병엔 뚜껑이 마땅치 않아 비닐을 씌운 뒤 고무줄로 묶어 썼다. 위생에도 좋지 않았고 줄줄 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박씨는 1969년 우유 병마개를 개발해 자수성가했다.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도 크다. 6.25 전쟁에 참전해 받은 훈장을 유난히 아낀다.

그런 그의 손녀가 골프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 박인비는 “18번 홀에서 울렸던 애국가는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노래보다 감동적이었다”며 “2020년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면 올림픽 금메달은 좋은 목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9월 열리는 에비앙 챔피언십에도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올림픽 금메달로 ‘골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데 이어 아무도 못해 본 ‘수퍼 골든 그랜드 슬램’이 욕심난다는 이야기다.

수퍼 골든 그랜드 슬램이란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에서 만든 신조어로 LPGA투어 5개 메이저 대회와 올림픽 금메달을 모두 휩쓰는 걸 말한다. 박인비는 2012년 에비앙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당시 이 대회는 메이저가 아니었다.

성호준·김두용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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