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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의사 출신 탈북자의 ‘마지막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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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모란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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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모란
내셔널부 기자

23일 오전 8시쯤 인천의 한 장례식장. 산부인과 의사 출신 탈북자였으나 남한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숨진 김모(48)씨의 발인식이 숨진 지 열흘 만에 열렸다. 유가족 등 50여 명이 오열했다.

김씨는 지난 13일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한 고층 건물 2층의 내부 유리창을 닦다가 발을 헛디뎌 지하 1층으로 추락해 현장에서 숨졌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지 10년 만이었다.

함경북도 청진시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김씨가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간질환을 앓던 아내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탈북한 처가 식구들이 “남한의 의료 수준이 높다”고 말해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북한을 빠져나왔고 2006년 8월 남한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정착지원금으로 받은 돈은 탈북을 주선한 브로커 비용과 아내의 병원비 등으로 소진했다.

북한에서 의사로 일한 경력을 남한에서 인정받지 못해 김씨는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 2010년 한 대기업이 출자해 만든 사회적기업 A사에 취업했다. 탈북자·장애인·고령자 등과 함께 주차 관리 업무를 맡았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주임’으로 승진도 했다. 다행히 아내도 2014년 간 이식 수술을 받아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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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러던 지난 5월 회사의 주차 관리 업무가 외주로 바뀌면서 김씨는 ‘사원’으로 사실상 강등돼 청소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임금도 월 180만원에서 140만원으로 줄었다.

A사는 “현 조건을 유지해 줄 테니 주차 업체로 회사를 옮기라고 제안했는데 김씨가 ‘회사에 남겠다’고 했다”며 “직책·야근수당 등이 달라지면서 임금도 차이가 나게 됐다”고 해명했다.

사고가 나자 유가족들은 “회사가 사고를 김씨의 책임으로 미루고 있다”며 진정성 있는 사과 등을 요구했다. 당초 15일로 예정된 발인식도 연기했다.

결국 23일 자정 유가족과 A사가 극적으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A사의 모기업 고위 관계자가 직접 나와 “안전 관리 미흡으로 사고가 났다”며 사과했다. 회사는 유가족에게 형식적인 안전 교육을 개선하고 안전장비를 지급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김씨의 장례도 회사장으로 치렀다.

김씨의 죽음을 계기로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은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비정규직과 탈북자 정착, 대기업 산하 사회적기업 실태를 조사하기로 했다.

숨진 김씨가 남쪽에 남은 동료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남긴 셈이다. 김씨의 유가족을 도운 신영욱 목사는 “탈북자 정착 문제에 우리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모란 내셔널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