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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핵 선제사용 안 한다” 세계에 약속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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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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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트라이트
전 미군 합참부의장

미국은 1945년 핵무기를 보유한 직후 트루먼 당시 대통령의 승인하에 고위 군사령관들이 ‘핵무기 선제사용(first use)’ 계획을 수립했다. 소련이 유럽을 침공할 경우나 미국이 중국·북한과 전쟁을 할 경우에 대비해 마련한 긴급 군사계획이었다.

핵무기 용도 뚜렷이 격감
경제·외교력이 진짜 무기
‘핵 선제불사용’ 천명하면
북한도 핵개발 명분 상실

그러나 91년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이 혁신적으로 발전하면서 핵 선제사용이 필요한 범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핵무기의 용도는 딱 하나뿐이다. 적국이 핵무기로 미국이나 미국의 동맹국을 선제공격할 가능성을 억지하는 것이다. 그 외에 핵무기는 쓸데가 없어졌다.

미국이 미국을 지킬 진정한 무기는 경제력과 외교력이다. 또 미국이 보유한 재래식 무기나 사이버 무기의 파괴력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금의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나 무장집단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글로벌 군사강국이 됐다. 적국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미국은 핵무기 없이도 자국과 동맹국의 안보를 능히 지킬 수 있다.

만일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선제사용한다면 러·중의 전면 보복전이 개시돼 미국과 동맹국의 생존이 위협당하게 된다. 또 생화학무기를 보유한 국가나 테러단체는 핵을 보유한 국가에 비하면 위협의 정도가 눈에 띄게 떨어진다. 이런 상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건 불필요하다. 생화학무기나 테러를 억지할 수단들은 이미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는 것도 안 된다. 그랬다가는 방사선 낙진이 한국과 일본을 뒤덮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미국은 ‘핵 선제사용’ 옵션을 군사전략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러면 미국과 동맹국들의 위험이 줄어들고 이익은 늘어나는 효과를 누릴 것이다. 우선 미국의 적국들이 미국에 핵무기를 선제사용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적국의 지도자는 미국의 핵무기가 억지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란 사실을 알기에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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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핵 선제사용’ 원칙을 배제하면 미국 내 핵무기 저장고에 축적된 핵미사일들과 유럽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들이 감축돼 미국의 막대한 군사비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지상에서 발사되는 미국의 핵미사일은 대부분 선제공격용으로 개발돼 적국의 선제공격에는 취약하다. 적국이 핵 선제공격을 할 경우 방어용으로 이들 미사일을 사용하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그러므로 선제공격 용도로 개발된 미국의 핵미사일들은 아주 없애버리는 게 최상의 선택이다.

미국이 핵미사일을 단계별로 감축하고 대신 잠수함·폭격기에 방어용 핵미사일을 배치한다면 향후 30년간 군사비가 1000억 달러나 줄어들 것이다. 나아가 유럽 등에 배치된 전술형 핵무기까지 폐기하면 수십억 달러의 군사비를 추가로 절약할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내년 초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핵무기 550개를 장기 보관용으로 전환시켜 지상발사 핵미사일의 단계적 철폐를 시작할 수 있다. 이들 미사일은 핵공격 억지를 위해서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잉여 무기에 불과하다.

또 ‘핵 선제공격’ 불가를 결정하면 핵무기를 우발적이거나 무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공격에 취약한 지상발사 미사일을 폐기하면 ‘경보 즉시 발사’의 필요성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적재한 미군의 전략 폭격기들도 긴급상황에서 핵미사일을 오폭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게다가 ‘핵 선제사용’을 금지시키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핵무기 지휘권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주는 효과도 생긴다. 핵무기 감축으로 늘어난 예산을 백악관 경호실과 통신시설에 투자하면 위기 발생 시 미국 대통령을 보호하거나 정부의 연속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미국이 핵 선제사용을 금지하면 국제사회는 핵무기 군축을 위한 다자협상에 나설 유인이 커진다. ‘미 제국의 핵위협’을 핑계로 핵무기를 개발해온 불량국가들도 명분을 잃게 된다. 반면 미국이 주도해온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정당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핵 선제사용’ 금지 원칙은 미 대통령의 핵무기 권한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미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견제는 국익에도 부합한다. 오히려 오바마 대통령은 ‘핵 선제사용’ 불가 원칙을 통해 핵무기의 존재 의의를 약화시킬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물론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설치된 미군의 핵우산은 계속해서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중국과 인도는 이미 ‘핵 선제불사용’ 원칙을 채택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도 압도적으로 ‘핵 선제사용 불가’ 원칙을 지지한다. 응답자의 3분의 2가 “적국이 핵공격을 해오지 않는 한 핵무기를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 선제공격 불가’를 결정한다면 러시아·영국·프랑스 등 다른 핵 보유국들도 이를 따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차기 미국 대통령 역시 같은 노선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 세계는 더욱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제임스 카트라이트 전 미군 합참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