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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환상 편의점 #2. 사랑의 묘약 (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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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 같은 짓이야.’

민영은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가 그냥 놓았다. 환상 편의점이라는 묘한 가게에서 사랑의 묘약이란, 역시 묘한 음료를 집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집에 돌아와서 한숨 푹 자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맑아진 정신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과연 이 사랑의 묘약이란 것을 정현에게 먹여도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행여 내용물이 이상한 것이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텐데.’

저번에 집에 찾아갔을 때 정현의 서슬로 보아, 자신을 독살하려 들었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좀 더 자세한 걸 묻기 위해 문제의 편의점을 찾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은 마치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때 사용법과 성분 등을 좀 더 자세히 물어보지 못한 게 새삼 후회되었다.

고민 끝에, 혹시나 해서 민영 자신이 시험 삼아 한 모금을 마셔 보았다. 묘약을 입에 머금은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셨는데 맹물이 입에 들어왔을 때의 기분이랄까. 사랑의 묘약은 고운 빛깔과는 달리 아무 맛도, 냄새도 없었다. 어쩐지 속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차피 공짜로 집어온 것이니 상관없다 싶었다. 최소한 독극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시험해 보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먹어도 몸에 탈이 없다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 정현에게 먹여보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고, 혹시 효과가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유혹이었다. 무엇보다 신비한 점원의 말을 들었을 당시의 전율이 잊히지가 않았다.

- 사랑의 묘약을 고르신 건 탁월한 선택이에요. 그 약을 잘만 쓰면 손님을 울린 남자의 마음을 다시 붙들어올 수 있습니다.

- 원래 그런 약이니까요. 머리가 아플 때 두통약을 먹듯이 말입니다.

그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말을 믿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결국 민영은 정현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가 받으면 시도해 보고 아니라면 단념하기로 했다. 운명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그가 자신의 전화를 받고 만남을 수락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액정에 뜬 내 번호만 봐도 안 받겠지.’
또 여러 번 주저한 끝에, 민영은 오랜만에 정현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곧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쩐 일이야? ]

민영은 깜짝 놀랐다. 스마트폰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긴장하지 말자. 조짐이 좋아.’

그녀는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생각해 두었던 내용을 천천히 말했다.

“잘 지냈지?”

[ 그럭저럭. ]

“오빠. 나, 그만 오빠 보내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딱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면 안 될까? 그러면 앞으로 정말 연락 안하고 귀찮게 하지도 않을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잠시의 침묵 후, 그가 물었다.

[ 정말이냐? ]

“응. 정말이야.”

[ 알았다. 그럼 내일 밤에 늘 가던 바(bar)에서 만나자. ]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민영은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언제까지고 수화기를 든 채로 서 있었다. 병에 든 사랑의 묘약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 민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큰 맘 먹고 고급 미용실에서 머리를 한 다음, 백화점에 들러 옷도 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예쁘게 차려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홍대 근처의 리멤브런스(remembrance) - 즉, ‘추억’이라는 이름의 바였다. 음료와 칵테일 가격이 저렴하고 분위기도 좋아서 학생 커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홍대는 여전히 분주하고 활기찼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다른 이성의 시선이 야릇하면서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직 안 죽었네, 강민영.

민영은 지하로 내려가는 바의 입구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름 그대로 이 바에는 두 사람이 함께 한 추억이 많았다. 정현에게서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은 것도 이곳이었다. 그가 하필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게 뭔가 의미심장했다. 생각하던 민영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도 참, 아직도 뭔가 기대를 하고 있다니. 그냥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랬겠지. 그러고 보니 여기 오는 것도 오랜만이네.’

언제부터였을까. 정현과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민영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정현에게 헌신했고, 그가 뒤늦게 외무고시를 준비하겠노라고 선언했을 때도 진심으로 지지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탄탄한 직장을 그만두고 바늘구멍보다 통과하기 어렵다는 외무고시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그의 합격을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은 민영뿐이었다.

정현이 고시원에 틀어박힌 채 공부하면서 아무 수입도 없이 보낸 몇 년 동안, 민영은 힘들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그에게 용돈을 주고 데이트 비용으로 써도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친구들에게서는 등을 돌렸다. 그래도 정현이 있어서 외로운 줄 몰랐다. 시골에 계시는 정현의 부모님보다 더욱 살뜰하게 그를 보살폈고 그가 결국 합격했을 때는 자기 일보다 더 기뻐하며 울었다.

‘아!’

문득, 정확히 기억이 났다. 조금 더 생각하면 날짜까지 떠오를 듯했다. 그때부터였다. 정현이 외무고시에 최종 합격해서 연수를 다녀온 후. 그 뒤부터 그는 이상하게 짜증이 늘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민영과의 만남을 피하기 일쑤였다. 그때는 그저 그의 말대로, 새로운 환경에서 준비할 게 많아서 그러려니 했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하디흔하게 나오는 사연이 아닌가. 고시 공부하는 연인을 오랫동안 뒷바라지했더니, 정작 그가 합격한 후에는 변심하여 버림받는 얘기.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좀 더 부유하고 예쁜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얘기들.

그저 남의 이야기라고, 화면 속 얘기라고만 믿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었다. 연인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수상한 가게에서 산, 성분조차 알 수 없는 약에 기대해야 하는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사실, 이것도 정말 믿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수능 시험을 앞두고 어머니들이 교문에 엿을 붙이고 기도하는 것, 그런 행동에 가까웠다. 결과는 결국, 그 자녀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짓이라도 안 해보면 너무 허무할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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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이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정현이 손을 들었다. 그는 둘이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있었다.

“여기야.”

그를 보자 민영의 가슴은 또 눈치 없이 설렜다. 허름한 운동복 바지에 까치집 지은 머리를 하고 다닐 때도 마냥 좋았는데,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자 첫눈에 반했던 때의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기분 탓일까. 민영을 향한 정현의 눈빛도 얼마 전처럼 짜증이 섞이거나 권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짧은 치마를 주의하며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자, 그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생각보다 좋아 보인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민영의 허벅지 언저리를 훑었다가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뭐야?”

“아…….”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전혀 못했다. 정현을 만난다는 사실에 들뜨고 긴장해서 정작 용건을 생각해오지 않은 것이다. 멍청하긴. 오빠한테 약 먹이려고 만났다고 할 순 없잖아.

민영의 짧은 침묵에 정현이 지루해할 무렵, 다행히 한 가지 핑계가 번득 떠올랐다.

“물건 때문에.”

“물건?”

“응. 우리 집에 오빠 물건이 많잖아. 옷이랑 칫솔, 책……. 같은 것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뭐 그런 걸 신경 써? 그냥 다 버려.”

“책도 버려?”

“아까우면 헌책방에 팔아.”

“그럼 오빠 집에 있는 내 물건은? 난 버리기 싫어. 그런데 이제 오빠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택배로 부쳐줄 거야?”

잠시 생각하던 정현이 말했다.

“그럼 지금 와서 가져가든가. 몇 가지 없으니까.”

“지금?”

“그래. 바빠서 택배 부치고 할 시간 없어. 지금 와서 안 가져가면 그냥 버릴 테니까.”

말하는 정현의 눈이 다시 한 번 민영의 가슴이며 아랫배 언저리를 지나갔다. 민영은 그가 뭘 원하는지, 그런 후에는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가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한 번 더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이성을 짓눌렀다.

하나가 됐다고 느끼는 순간은 빠르고 허무하게 지나갔다. 정현은 늘 하던 대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욕구를 푼 다음, 즉시 몸을 떼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기고.

“나 나오기 전에 일어나서 옷 입고 물건 챙겨.”

민영이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문득 협탁에 놓인 정현의 휴대전화에서 소음이 울렸다. 문자왔숑! 문자왔숑! 문자 착신을 알리는 소리인 듯했다. 문자왔숑? 민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꽤 오래전 방영됐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휴대전화 착신 음으로 설정해놔서 인기를 끌었던 소리다. 민영이 아는 정현의 성격상,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착신 음으로 설정하지 않을 것 같은 소리. 아마 설정 방법 자체를 모르리라.

얼른 일어나서 휴대전화를 보니, 언제 바꿨는지 모를 최신형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 메시지 내용이 떠 있었다.

< 자기 모해? >

예상했던 일이지만 가볍게 현기증이 일었다. 역시 정현에게는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잠깐 머릿속이 하얘져서 손을 떨고만 있는데, 문득 스마트폰 옆에 놓인 생수병에 시선이 갔다.

그래. 정현은 늘 정해진 순서를 지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물건도 항상 있는 자리에 있어야 했고 어쩌다 민영이 오기로 한 시간보다 5분만 늦어도 난리가 났다. 그의 규칙에 따르면 그는 정사를 마친 후, 샤워를 하고 늘 머리맡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민영은 조심스레 일어나 핸드백에서 사랑의 묘약이 든 병을 꺼냈다. 그리고 생수병의 뚜껑을 연 다음, 거기에 분홍빛 약물 한 방울을 넣었다. 점원의 목소리를 상기하면서.

- 일주일에 한 방울. 그 양이면 충분합니다. 일주일에 한 방울씩 한 달입니다.

민영이 떨리는 손으로 사랑의 묘약을 다시 핸드백에 넣었을 때, 욕실에서 정현이 나왔다. 그는 민영을 보고 짜증 섞인 투로 내뱉었다.

“뭐야. 너 아직 옷도 안 입었냐?”

“지금 입으려던 참이야. 미안.”

“하여간. 느려 터져가지고.”

이어서 정현은 생수병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민영은 옷을 입으며, 꿈틀거리는 그의 목울대를 곁눈질했다. 그는 500밀리리터 생수병의 3분의 2 이상을 비웠다. 물에 대해서는 맛이 이상하다거나,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등의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나 민영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려, 그 소리가 정현의 귀에 들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옷을 다 입은 민영은 서둘러 정현의 방을 나왔다.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야. 너 짐 챙겨간다며. 안 가져가?”

“괘, 괜찮아. 그냥 버려줘.”

“뭐야. 장난하나.”

민영은 자신이 도망치듯 나온 이유가, 물에 이물질을 탔다는 사실을 정현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휴대전화 문자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금방이라도 따지고 들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워서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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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단행본 <문답 무용>, <파이널 에볼루션> 출간
    <도전!웹 소설 쓰기>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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