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하나 잃어버려 난리랍니다"…이영종 기자의 '태영호 탈북망명' 특종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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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분들이 테임즈 강변에서 아이 하나를 잃어버려 난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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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국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의 탈북을 보도한 BBC 화면(사진 오른쪽이 태영호). [중앙포토, BBC 캡처]

시작은 짧고 강렬했다. 보통 일이 벌어진 게 아니구나 하는 '촉'이 왔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태영호 공사 일가족의 탈북 망명을 최초로 보도한 중앙일보의 특종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달 초 동남아 지역에 체류 중인 '대북 소식통'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긴박한 사안이 있을 때만 쓰기로 한 기자의 2G폰을 통해서다. 베테랑 정보맨들 사이에서 '윗동네'는 북한을 의미한다. 2001년 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극비 방중 사실을 기자가 특종했을 때 핵심 정보를 제공해 준 인사도 공중전화를 통해 "윗동네 제일 높은 양반이 조금전 기차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알려온 적이 있다.

대북 정보 관계자들이 '아이를 잃어버린다'는 말은 꽤나 중요한 인물이 북한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일컫는다. 소식통의 전언은 런던에서 활동하던 북한 핵심 인사가 며칠 전 탈북했음을 직감케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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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부인 및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한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소속 태영호 공사. [중앙포토, 유튜브 캡처]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북정보 핵심 관계자나 정부 당국자들은 금시초문이란 반응을 보였다. 오랜 취재 경험상 이들이 실제 관련 정보에 접하지 못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정부 내에서도 핵심 고위인사 몇몇만이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상당히 민감한 인물의 탈북망명 프로세스가 진행중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 같던 사태의 윤곽은 일주일 넘는 고위층 대상 취재를 통해 조금씩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복수의 취재원을 통해 망명한 인사가 "매우 특이한 성을 가진 인물"이란 점을 파악했다. 한 고위 인사는 "북한의 신경이 날카롭다. 안전하게 벗어날때까지만 참아달라"며 사실상 탈북 사실을 확인해줬다. 망명 사태로 평양의 외교 책임자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궁지에 몰렸다는 내부 동향도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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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1947년 6월 오백룡과 함께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했을 당시 모습.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백룡의 품에 안겨 있다. 17일 한국으로 망명한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소속 태영호 공사의 부인 오혜선은 김일성 주석의 빨치산 동료인 오백룡 노동당 군사부장의 친척이다. [중앙포토, 유튜브 캡처]

며칠이 지나면서 망명신청을 한 일가족이 북한의 추적을 벗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바로 기사를 게재하는 쪽으로 결론났다. 최종확인을 거쳐 8월16일자 한개면에 걸쳐 탈북망명 사태 발생과 가족 동반 사실 등을 해설과 함께 실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인적사항이나 망명 결심 등의 과정은 드러낼 수 없었다. 탈북망명자의 경우 신변보호를 위해 서울 도착 또는 그에 준하는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구체적 신상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중앙일보의 취재원칙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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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외교관의 탈북 사실을 특종 보도한 중앙일보 8월16일자 6면

첫 보도 이후에도 정부 당국은 언론의 사실관계 확인 요청에 대해 "확인되지 않는다"거나 "확인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를 토대로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런던에서의 탈북망명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했다. 하지만 BBC를 비롯한 외신의 태도는 달랐다. 중앙일보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에 들어갔고,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자신들이 취재한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자문하거나 관련 정보를 문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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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를 인용해 북한 외교관의 탈북 사실을 전한 영국 BBC의 기사. [자료=BBC 홈페이지]

BBC의 후속 보도 이후 국내 언론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태영호가 런던에서의 생활을 설명하거나 북한체제에 대한 옹호 연설을 한 유투브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파장은 번져나갔다. 태영호의 부인 오모씨와 깊은 친분이 있다는 고위 탈북인사는 기자와 만나 "오씨가 항일빨치산 오백룡의 일가"라는 점을 귀띔해 후속 보도에 의미를 더해줬다.

결국 중앙일보의 보도 이틀만에 통일부는 공식 브리핑을 통해 태영호씨 일가의 탈북망명과 한국 도착 사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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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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