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2016] “아쉬운 패배도 진 건 마찬가지” 실력도 성격도 화끈한 정영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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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추락하는 한국 탁구에 한줄기 빛이 비쳤다. 바로 ‘우리 영식이’ 정영식(24·미래에셋대우)이다.

독일과 탁구 단체 3·4위전 졌지만
불꽃 투혼에 팬들‘우리 영식이’
개인전서도 1위 마롱과 명승부
“4년 뒤 도쿄에선 금메달 딸 것”

18일 리우데자네이루 파빌리온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탁구 단체전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은 독일에게 1-3으로 졌다. 이로써 한국은 탁구가 정식 종목이 된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28년 만에 첫 ‘노메달’에 그쳤다.

하지만 정영식 만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3~4위전 유일한 승리도 그의 몫이었다. 베테랑 바스티안 스테거(35)를 상대로 마지막 세트 8-10으로 몰린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 경기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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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식이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한국은 단체전 4위에 머물렀지만 정영식은 세계 강호들과의 대결에서도 선전을 펼쳤다. 독일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스테거를 꺾고 기뻐하는 정영식.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특히 ‘행운의 엣지’로 마지막 점수를 따낼 때는 스스로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는 듯 했다. 평상시엔 귀공자처럼 곱상한 외모지만 탁구공만 잡으면 매서운 표범처럼 돌변하는 모습에 팬들은 “스포츠 만화 주인공이 현실로 뛰쳐나온 것 같다”며 열광했다. 현정화 전 대표팀 감독은 “정영식의 발견은 이번 대회 최고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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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식 열풍은 9일부터 불기 시작했다. 세계랭킹 1위 마룽(28)에게 강력한 펀치를 연속 날렸다. 마룽은 좀체 빈틈을 찾을 수 없어 중국 대표를 넘어 ‘지구 대표’로 불리는 선수다. 하지만 개인전 16강전에서 정영식은 빠른 스텝과 강력한 드라이브로 처음 두 게임를 내리 따냈다. 비록 2-4로 패했지만 중국 선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경기 뒤 마룽도 “초반엔 나도 초조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16일 중국과의 단체전 준결승도 인상적이었다. 런던 올림픽 2관왕이자 2011년과 13년 세계선수권 남자 단식 정상에 오른 장지커(28)를 상대로 정영식은 만만치 않은 화력을 과시했다. 비록 2-3으로 분루를 삼켰지만 유남규-김택수-유승민 이후 명맥이 끊겼던 한국형 공격 탁구가 다시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지커 역시 “최근 4년간 이렇게 많이 뛰어다닌 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탁구 전종목을 석권한 중국을 유일하게 긴장시킨 선수가 정영식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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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의 단체전이 끝난 뒤 경기장을 찾은 팬과 기념 촬영을 하는 정영식.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네티즌들은 “절대 열세임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 감동적”이라며 그를 ‘우리 영식이’로 부르고 있다. 국내의 폭발적 반응과 달리 정작 정영식은 “허탈하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아쉬운 패배라지만 그것 역시 진 거 아닌가. 이게 내 실력이니까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정영식은 태릉선수촌에서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훈련에 매진하는 연습벌레다. 소속팀 미래에셋대우의 김택수 감독은 “연습 경기도 마치 올림픽 결승처럼 해서 내가 말릴 정도”라고 전했다. 탁구 명문 내동중-중원고를 거친 정영식은 국내 대회에선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 대회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해 ‘국내용 선수’라는 말을 들었다. 2014년엔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서도 부진이 계속되자 차라리 출전권을 반납할까도 심각히 고려했다고 한다.

정영식은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선수들을 집중 연구했다. 마룽 등의 동영상을 아이패드에 넣어 한밤중까지 보다가 잠들곤 했다. “어차피 중국엔 안 되니 메달 따려면 다른 나라를 분석하라”는 충고가 많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정영식은 “지금은 ‘아름다운 4위’라는 말을 듣지만 4년 뒤 도쿄 올림픽에선 꼭 금메달리스트로 축하 인사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리우=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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