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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과 ‘변방의 북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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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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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

바람 한 점 없이 온 나라가 폭염에 갇혀 있지만 여의도 정치권은 내년 대선을 향해 바람 소리 나게 잰걸음을 옮기고 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독도에 이어 서해 최전방인 백령도를 찾는 등 안보 이미지로 브랜드를 보강하고 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호남·충청에서 민생투어를 하며 시간을 낚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도 위기 인식을 내걸고 강연 정치를 재개했다. 여기에 개헌을 매개로 한 중도 신당 간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5년 전 이맘때 여권에선 지지율 단독 1위였던 박근혜 후보가 2위 그룹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반면 야권은 손학규·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서로 거리를 재며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대진표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후보군에 들락날락하면서 여권은 여전히 안갯속 구도이고 야권도 여러 후보들이 각축 중이다. 여기에 요즘 여의도 화제의 중심인 이정현 새누리당 신임 대표와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 대표의 진퇴가 맞물리면서 대진표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는 양상이다.

이 대표는 권위와 격식을 따지지 않기로는 여야를 통틀어 전례 없는 파격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공식 일정에 없이 국책연구원을 방문한 뒤 다시 대학 도서관에 불쑥 나타나는 식이다. 비주류 체질이 몸에 밴 돈키호테 같다는 소리도 나온다. 돌직구 스타일의 직설화법으로 당 대변인과 경쟁하듯 기자들을 만나고 석양이 질 무렵 기자들 휴대전화에 그날 일과를 남기는 것도 이정현식 파격이다. 급기야 토너먼트 형식의 경선 아이디어까지 치고 나가는 등 정신없는 한 주를 보냈다. 어디로 얼마나 튈지 가늠하기 어려운 이정현만의 개성을 보여줬다. 어제 이 대표가 소집한 4선 이상 중진(21명) 모임에 9명이 참석했다. 당 사무처 출신으로 비례와 보궐까지 합쳐 3선 고지에 오른 이 대표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계파갈등으로 벼랑 끝에 몰렸던 새누리당이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닌 당 주류와는 거리가 먼 변방 출신을 등용했다. 당 대표는 내년 대통령 선거의 경선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길목을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위치 에너지를 동력 삼아 응집력을 끌어낼 수 있느냐는 이 대표가 풀어야 할 숙제다.

연초 더민주는 김종인이라는 기상천외한 카드를 깜짝 영입했다. 지난 대선 상대 진영의 핵심 정책 브레인을 수혈했다. 기력을 회복한 더민주는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제1당을 거머쥐기도 했다. 외인부대를 통한 이종교배의 진수였다. 다음주 전대가 끝나면 김종인의 실험은 일단 막을 내린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호랑이가 산을 내려오고 있다”고 말한다. 호랑이가 더민주의 체질과 내성을 얼마나 바꿔놨는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이제 대선 판도는 변방에서 울리는 북소리의 울림과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의 행보에 따라 요동칠 것이란 관측이 무성하다. 큰 무대를 앞두고 승부사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뜨거운 여름이다.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