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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뭉개다가…저출산 대책 사흘, 전기료 한나절 새 뚝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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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김성태]

‘대한민국 정책 1번지’ 세종이 표류하고 있다. 주요 부처가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한 지 4년째를 맞아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내놨다가 여론의 반발, 국회와 청와대의 지적에 번복하는 사례가 최근 더 잦아졌다. 임기 말에 접어들며 한층 무기력해진 행정부와 ‘표’가 되는 선심 정책에만 골몰하는 정치권의 행태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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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정책 1번지’ 세종
현장과 떨어져 외딴 섬처럼 돼버려
현실과 괴리된 정책 양산 비판도
“문화 기획사 하나 없는 세종에서
문체부가 무슨 민생을 접하겠나”
간부들 서울 가면 과장 이하만 남아
후배 훈련 못 시켜 재탕 정책 반복

공정거래위원회 A국장은 “국회가 열리는 철이면 하루 동안 ‘V’자 코스로 움직이는 건 예사”라고 말했다. 이동하는 데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세종에서 서울로, 다시 세종으로 오는 경로다. 그는 “일정이 꼬여 ‘N·M’자 코스로 움직일 때도 적지 않다”며 “한번은 서울에서 내내 대기하다가 회의가 취소됐다고 해서 세종으로 가는데 기차 안에서 ‘회의를 다시 열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아 중간 역에서 내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한 관료는 “심지어 당정회의 때 조는 과장급 이하 직원도 있다. 준비에, 이동에 지쳐 집중도가 떨어지는데 효과적인 행정 서비스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주 8일부터 12일까지 닷새 가운데 나흘은 서울에서 일정을 소화하며 보냈다. 유 부총리는 9일 추가경정예산 대국민 담화 발표(정부서울청사), 10일 규제프리존 간담회(여의도 국회), 11일 누진제 긴급 당정협의(국회), 12일 국무회의(청와대)에 참석했다.

중앙부처 한 공무원은 “이동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차분하고 깊게 생각하거나 의논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부처 간 화상회의를 하지만 직접 만나서 얘기할 때와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간부들이 국회나 장관 일정을 따라 서울에 머무는 사이 세종을 지키는 건 과장급 이하 실무자들이다. ‘국장-과장-사무관’으로 이어지는 업무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재부 B국장은 “실·국장이 후배를 훈련하거나 서류를 꼼꼼히 챙겨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질이 떨어지는 보고서, 외국 정책이나 과거 정책을 짜깁기한 ‘재탕·삼탕 정책’이 반복되는 이유다.

바닥 여론과 점점 동떨어지는 생활이 현실과 괴리된 정책을 낳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세종시에 떨어져 있는 데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만 만나는 공직자가 적지 않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 찾아오는 기업 ‘대관’ 담당자나 산하기관 임직원하고만 접촉하니 업계 입장만 대변하는 편향성을 띤다는 지적이다.

기재부 C서기관은 “업무 협의차 다른 부처 실무자와 논의를 하는데 지나치게 업계에 치중된 입장만 반복해 놀란 적이 있다”며 “일부러 세종시를 찾아오는 기업 관계자만 만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고 전했다.

임승빈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예를 든다면 관광호텔이나 문화 기획사 하나 없는 세종시에서 무슨 민생을 접하겠느냐”며 “세종시 공무원의 현실 감각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민생 현장과 괴리되다 보니 세종시 공무원들은 안주와 복지부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로 인해 대응 폭이 줄었는데 이를 복지부동으로 비판하는 건 과하다고 주장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여당이 다수일 때도 법안 하나 통과시키기 어려웠는데 여소야대에선 말해 무엇하겠느냐”며 “국회에서 괜한 역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방어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법 개정안의 폭이 예년에 비해 작아지고, 추가경정예산안 편성도 밀려서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 역시 이런 영향 때문이다.

관가가 ‘복지부동’하는 사이 정책 주도권은 국회로 넘어가는 모양새다. 이번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대응도 행정부가 아닌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가 오히려 빨리 움직였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국회가 거수기 역할만 했다면 이제 행정부가 지나치게 ‘을’ 처지가 됐다”며 “국회는 큰 방향을 찾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해야지 행정부에 대한 과한 통제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최고 엘리트라는 세종시 관료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관료들이 안분지족에 빠져 있는 건 국가 손해”라며 “민간이 더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공직자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성시윤·함종선 기자,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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