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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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 불교의 대선 각인 원효대사의 열반 1천3백 주기를 맞아 11일 그의 성상 건립을 위한 대불사가 불교 원효 종을 중심으로 추진된다.
일본작가 「미시마·유끼오」의 4부작 『풍요의 바다』의 제1부 『춘설』에는 두개의 법 화가 인용돼 있다.
하나는 원효의 입당구법 길의 깨달음이고, 다른 하나는 『인타나 그물설화』다.
그것으로 「미시마」가 「화엄사상에 흠뻑 젖어있었고, 그 일본 화엄사상이 바로 원효와 의상의 신나 불교의 영향이란 것을 실감케 한다.
일본의 불교학자 겸전무웅은 원효를 『조선 고금을 통한 대 저술가며 그 시대 동아시아 제1회 저술가였다』고 찬탄할 정도다.
그의 저술의 상당부분은 인멸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저술만으로도 그의 위광은 사해를 덮을만하다.
특히 중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금강이매경소』와 『대승기신론소』다.
그의 『금강삼매경소』는 처음 5권으로 저술되었으나 어떤 자가 훔쳐갔기 때문에 사흘동안의 말미를 얻어 다시 저술된 것이 약소 3권이다.
이것이 중국에 전해져 『금강삼매경론』으로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이 쓴 글이라면 「소」가 되겠지만 보살이 쓴 만큼 훌륭한 저작이기 때문에 「론」이 된 것이다. 「경」은 물론 부처님의 말씀이다. 7세기 초 당에서 만들어졌던 『금강삼매경』에 대해 중국에선 누구도 주소를 쓰지 못했다. 원효의 주석이 유일한 주석이었다. 때문에 원효의 주석은 중국과 일본의 불교학자들에게 지침서가 됐다.
그의 『기신론소』는 『해동소』라고도 불린다. 화엄종의 대성자 법장은 원효의 이 저술을 거의 그대로 인용해서 『기신론의기』를 썼다. 학자들이 『기신론』을 읽을 때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의기』라면, 원효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케 된다.
그러나 원효의 위대함은 오히려 화쟁사상과 무애행에 있다.
그는 모든 불교 이론들의 갈등과 질시 투쟁의 양상을 통섭하고 종합·비판·융화했다. 불교 이론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갈등 등을 두루 화합·통일 시켰다.
화쟁은 그의 중심사상이며 생활신조였다. 그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사상이 되고 현세불국사사상이 되었다.
원효는 삼계 화택인 현세에서 먼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무애한 보살 행을 실천했다. 저자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일방 자비와 진리의 변설도 폈다.
『모든 것에 거리낌없는 이라야 대승의 길에서 생사번뇌를 벗어난다』(일절무애인 일도출생사)는 것이 바로 그의 진리 관이었다.
민족화합의 대화쟁이 기대되는 시기에 민족의 사표인 원효 스님의 가르침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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