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초의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화환을 목에 건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의 오른쪽 인물이 이동휘 선생이다. 신인섭 기자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란 것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국무총리로 임시정부 지휘
사회주의 독자 노선 독립운동 벌이며 임정 결별
러시아어판 이동휘 선생 평전 국내 처음 공개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3ㆍ1운동 이후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렇다면 초대 국무총리는 누구일까? 해방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1900-1972) 선생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나 건국의 기원을 임시정부로 보면 달라진다.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는 성재 이동휘(1873-1935) 선생이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활동과 함께 러시아를 무대로 무장봉기 투쟁을 벌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로서 임시정부를 주도했지만 이념 차이로 끝내 갈라섰다. 이동휘 선생이 그 동안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다.

올해는 이동휘 선생의 서거 81주기 되는 해다. 『월간중앙』은 선생의 친손녀인 고(故) 이 류드밀라 씨가 2003년에 카자흐스탄에서 펴낸 『이동휘에 대한 이야기』(베레나 펴냄)를 단독 입수했다. 러시아어로 된 이 책은 300부만 발행됐다. 국내에 알려진 건 처음이다.

임정 초대 국무총리 지냈지만 이념 때문에 조국에서 잊혀져

이동휘 선생의 활동을 담은 일종의 평전이다. 그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까지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사료가 담겼다. 임시정부 활동 이후 러시아에 정착한 선생의 후손들과 친인척, 지역 주민의 증언을 토대로 했다. 이 선생의 사진과 자필 문서 등이 담겼다. 류드밀라 씨가 부친인 고 이영일 씨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이다.

책을 펴내기 위해 류드밀라 씨는 1998년부터 5년 동안 연구와 고증을 거쳤다. 그의 아들인 베케노브 마랏 아가랄로비치(63) 씨가 지난 6월 말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처음 소개했다. 『월간중앙』은 6월 23일 베케노브 씨를 만났다.

베케노브 씨는 안타깝게도 책을 펴낸 뒤 자료 원본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는 "오래 전에 이 책을 한국에서도 발간하기 위해 한국인 목사에게 원본 자료를 맡겼는데 연락이 두절됐다"고 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책도 한 권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를 희망했다.

베케노브씨는 "증조 할아버지가 군인이었다는 게 명예롭다"고 했다. 그도 군인이다. 베케노브 씨는 카자흐스탄 내무부 소속 중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난 카자흐스탄 군인이지만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

이동휘 선생은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될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군무총장(현재의 국방장관에 해당)을 지냈다. 그는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해 레닌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임시정부가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하도록 하는 등 독립운동 노선을 강화했다.

1918년에 최초의 한인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들었지만 1921년 임시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며 탈퇴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했지만 '사회주의자'란 낙인이 한동안 조국에서 그를 잊혀지게 했다.

기사 이미지

이동휘 선생의 손자인 베케노브씨가 조부의 사진이 들어있는 책을 펼쳐 들고 있다. 신인섭 기자

최후의 일인이 죽기까지 독립 이룰 것

그의 명예가 회복된 건 이국에서 눈을 감은 지 60년이 지나서였다. 1995년 우리 정부는 이동휘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13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동휘 선생의 죽음과 함께 가족들은 이국 땅에서 온몸으로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 아들 이영일씨는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에 의해 우크라이나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세 딸은 중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베케노브 씨는 "외할아버지(이영일)와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양파와 쌀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활하셨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 류드밀라 씨는 올해 3월 83세로 타계했다.

기사 이미지

이동휘 선생의 친필 서명이 들어있는 러시아어 문서. 신인섭 기자

베케노브 씨가 간직한 이동휘 선생의 평전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베케노브 씨는 한국어판 출간을 희망하면서 이 선생이 남긴 한 마디를 소개했다. 3ㆍ1운동 이후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창간된 『혁신공보』와 한 인터뷰(1919년 11월 4일자)의 한 대목이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선생의 좌익 독립운동이 현재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이념과는 다를 지 몰라도 목적은 오직 하나, '반일민족독립'이었다.

유길용ㆍ박지현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centerpar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