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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니 가부장제가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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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과격하게 페미니즘을 해야 돼?’, ‘여혐도 문제지만 요즘은 남혐도 똑같던데?’, ‘요즘은 남자가 더 힘들어. 이득 보는 것도 없고.’, ‘너 혹시 페미니스트니?’, ‘군대는 어떻게 생각해?’, ‘요즘 역차별이 더 문제던데?’, ‘여자는 의무는 피하고 권리만 챙기잖아?', ‘그게 왜 여성혐오야?’, ‘아니, 좋게 말하는데 왜 이렇게 예민해?’ ‘그래, 근데 네가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어?’

페미니즘을 논하다 보면 이런 질문에 맞닥뜨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하 '입트페')는 실전답안을 제시한다. 입트페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판된 책이다.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실전 대응 매뉴얼'을 내놓겠다며 200만원을 목표로 지난 6월 5일 모금을 시작했다. 20일 만에 약 4300만원을 넘겨 무려 2000% 이상의 결과를 달성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프로젝트 모금액의 2184%를 넘기며 제작된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 작은 책은 크라우드 펀딩과 행사 판매, 소규모 독립서점 직판만으로 7000부를 돌파했다. 예약판매를 한 2판까지 완판 됐다. 지은이는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사회학을 공부하고 외대 통번역대학원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있는 이민경(24)씨다. 그는 성차별을 주제로 한 대화에서 여성들이 더 이상 일방적으로 참거나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입트페'를 기획했다.

TONG기자단이 저자를 만났다. 청소년이 실제로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아무말 대잔치'에서 통쾌하게 한 방 날릴 수 있는 처방도 받아봤다.

-책을 쓴 계기는요.
"지난 5월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이 계기가 되었어요. 세월호 참사가 당시 중고등학생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줬던 것처럼 '강남역'은 제 사건인 거죠. 20대 여성인 제 또래의 친구들, 언니, 동생들이 가장 크게 반응했어요. '강남역 세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사건 이후 너무 괴로웠어요. 이견의 여지없이 이건 여성 혐오 살해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키보드 워리어들의 생각이고 저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남자친구가 악플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제 친구는 남자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는데, 남자친구가 친구의 마음을 '조금 알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 남자친구를 칭찬하는 거예요. '그 남자 잘 잡아라', '그런 남자 흔하지 않다', '그 정도라도 어디야' 이런 식으로 말이죠. 제 친구도 '그래 이 정도면 괜찮지' 이렇게 생각했고,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그날 불쑥 '괜찮긴 뭐가 괜찮아. 지금 누가 힘든데? 힘든 걸 참아가면서 설명을 왜 해야 하며, 기껏 설명을 다 했는데 누가 칭찬을 받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에 열이 받더라고요. 원래는 책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제 친구 한명만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더라고요. 주변의 다른 친구들,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얘길 하며 힘들어 하고 있었어요. '지금 다들 감정이 소진되었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책을 쓰게 되었죠."

- 책을 쓰면서 유의한 점이 있다면.
"유의하지 않았어요. 책의 첫 부분에 '주의사항'이 있어요. '이 책은 독자를 확보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나와 있죠. 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자 들어봐. 페미니즘 몸에 좋은 거야'라고 말할 힘조차 없었어요. 철저하게 완전히 소진된 상태, 제로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거든요. 지친 게 책에서 묻어나요. 즉 저처럼 여성 혐오 때문에 지친 친구만이 읽을 수 있는 거죠. 어차피 독립 출판으로 책을 낼 생각이었고 처음에는 딱 100권만 만들려고 했어요. 지인들을 비롯해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쓴 책인 거죠. 오히려 '페미니즘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은 출입하지 마라'는 느낌으로 썼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만 똑바로 할 수 있었죠. 훗날 제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론서 같은 책을 쓰게 되면 여러 사항을 고려하겠지만요."

- 책을 쓰면서 가장 답답했던 순간은.
"책을 쓰면서 다양한 사례를 수집했는데 '요즘은 가부장제가 없다. 왜냐면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니까'란 말을 한 남성이 있었어요. 빨래만 한다고 가부장제는 아니잖아요. 세상의 성차별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요. 아무리 세탁기가 발전해서 스스로 옷을 벗기고, 빨고, 넌다한들 성차별이 해소된 건 절대 아니란 말이죠. 시각이 얼마나 좁은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어요."

"페미니즘보다 '양성평등'이란 말을 쓰라는 남성도 있었죠. 똑같은 말인데 왜 페미니즘말고 양성평등을 쓰길 바라냐면, 페미니즘의 어원이 여성성을 뜻하는 라틴어 'femina'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에요. 즉 'male(남성)'은 어디 갔냐는 거죠. 양성을 모두 써라, 그렇지 않으면 편향됐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여성이 얼마나 부차적으로 취급받아 왔는지를 페미니즘으로 말하겠다는데 양성평등이라고 하지 않으면 편향됐다고 말하는 건 기울어진 저울추를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페미니즘은 기운 수평을 들어올려서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건데, 저 말은 '남성도 하나 더 얹어줘'라며 기울기를 유지하겠다는 거잖아요. 앞에서 말한 세탁기는 무식한 사례라면 이건 정말 얄미웠어요. 자신은 나쁘고 싶지 않은데, 기득권을 놓지 못하겠다는 모순적인 태도였으니까요."

- 책의 내용이 모두에게 지지 받지는 못했을 텐데. 
"편향됐다는 의견도 들었어요. 저는 제 렌즈로 본 걸 얘기 한 거니까 당연히 편향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근데 이 얘길 남성한테 들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여성학계에서 들어요. 석사는 물론이고 페미니즘을 전공하지 않고 페미니즘 책을 썼잖아요. 아마추어라 학계에서는 제 책이 조심스러운 거죠. 저도 학문적 근거에 기반해서 글을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보통 박사까지 10년 정도 걸리니까 제가 공부를 하고 책을 쓴다면 강남역 사건은 잊혀져요. 정교한 학문 서적을 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가 보고 느낀 게 있잖아요. 지금까지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라고 생각했고요. '입트페'는 페미니즘 회화예요. 한국어를 예로 들면 문법서는 쓰지 못해요. 하지만 회화책은 쓸 수 있잖아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쓰는 말'을 담으면 되니까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내는 과정에서 생긴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해요. 또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떳떳하게 나서기 힘든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침묵의 나선 이론이란 게 있어요. 한 사람이 침묵하면 주변도 똑같이 침묵한다는 거죠. ‘이런 말을 꺼내면 날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부담에 입을 열지 않는 거예요. 한 명만 말해도 많은 게 달라질 텐데 눈치게임 하듯이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운 거죠. 그런데 '메갈리아'가 등장하며 강력하게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눈치 보던 사람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페미니스트라고 밝히고 다니긴 했지만 가족들에게 얘기하는 게 어렵기도 했고 여러모로 눈치도 보였거든요. SNS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에 이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한 흐름만 봐도 그래요. 확실히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게 이전보다 쉬워졌어요. 침묵의 나선이 깨졌기 때문이죠."
- 스웨덴에서는 양성평등 정책을 정부가 주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저출산 문제를 개선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페미니즘이 사회에 받아들여지면서 생기는 효과와 변화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페미니즘은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자생한다'는 표현이 알맞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주의가 지배적인 기존의 사회에 균열을 내서 비집고 들어가는, 스스로 뚫고 나가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불청객 취급을 받죠. 하지만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정책에 녹여낼 수 있다면, 인구의 반이 덜 부당해지겠죠. 여성이 무용하게 취급받는 일이 없어질 테고,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이끌 수 있어요."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남성중심주의 사회 때문에 출산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페미니즘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성들에게도 좋아요.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가 절하되어 왔고, 여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남성 역시 '남자인 네가 왜 그거밖에 못해?'라는 프레임의 압박을 끊임없이 받아왔으니까요. 이런 프레임을 다 벗어내고 새로운 걸 꿈꿔 보자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기준'과 '정상'이라고 여겨왔던 정해진 길을 깨고 내가 원하는 길을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요."

- 저희 학교만 보더라도 페미니즘이 단순히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신념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이와 같이 청소년 사이에서 잘못 알려진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또래집단 간의 대화가 중요하고, 서로 눈치를 주지 말아야 해요. '너 잘 몰라서 그런 거 아니야?', '다시 한 번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상한 거 배운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한테 낯설다고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크게 보면 젠더 교육이 필수인 거죠."

"얼마 전에 고등학생 친구한테 부탁해서 교과서 중에 성평등을 다룬 부분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했는데 거의 없더라고요. 동성애, 성소수자, 성적자기결정권 등의 개념이 있긴 하지만 거의 부재한 수준이었어요. 근데 젠더 교육 없이는 성평등을 이룰 수가 없거든요. 왜냐면 여성은 살면서 직접 경험하고 몸으로 다치면서 남성중심주의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데 남성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서른 살이 되어도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니까 엄마는 편하고, 가부장제는 사라진 거 아니야?' 같은 말을 하는 거죠. 즉 교육을 통해서 남성도 함께 배우지 않으면 남성이 젠더 문제에 대해 깨달을 기회는 적어요."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젠더 의식에 대해 공부해 보는 게 정말 중요해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떤 게 부당하고, 그렇다면 왜 부당한지 끊임없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어요. 앞서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주의 학문으로 만들어진 기성 사회를 굳이 비집고 들어온 거니까요. 그 역사가 길면서도 짧고 변화가 더디면서도 굉장히 빨랐어요. 페미니즘이 이루어낸 긍정적인 변화를 믿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해요. 물리학이나 국어국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꼭 그런 말이 붙어요. 그래서 자기 검열을 끊임없이 하게 되고요. 그걸 내려놓고 조금 더 과감하게, 서로 서로 노력해야죠."

10대를 위한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실전편

-고등학교 2학년 A양은 수능 지문에서 ‘man’을 ‘인간’으로 해석한 게 의문이 들어 학원 선생님께 여쭤보았습니다. 학원 선생님은 여자를 지칭하는 woman의 어원이 womb(자궁) + man (남자)를 합친 단어로, '자궁이 달린 남자'라고 대답했는데요. 선생님은 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비웃듯이 말씀하셨고, A양은 그 순간 놀라 말문이 턱 막혔다고 합니다.
"찾아보니 woman의 어원이 정말 womb와 man이 합쳐진 단어더라고요. 저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는데 프랑스어도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인간으로 쓰여요. 아마 A양은 여성인 자신이 '기본형' 인간이 아니라 '추가형' 인간이라는 것을 느껴서 당황했다고 생각해요. 즉 교실에 함께 앉아 있던 남학생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남자애들이 기본형이고 나는 추가형인 순간을 경험한 거죠. 학원 선생님이 없는 말을 지어서 말씀하셨다면 비하적인 발언으로 문제 삼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실제로 세상이 얼마나 남성중심주의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해요. 자동차의 에어백 하나를 만들더라도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삼잖아요. 결국 여성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기존의 체계에서 다른 체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에요. 따라서 이 경험을 통해 세상의 불공평을 느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 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트와이스의 'Cheer Up'의 가사에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여자니까 이해해주길'이라는 내용이 있었고, '또 오해영'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엄마가 딸에게 '여자는 조신하고, 요리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여성 차별적인 대사가 나왔어요. 이처럼 남성이 여성을 핍박하는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들이 스스로를 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Cheer Up’의 가사나 ‘또 오해영’의 대사 모두 가부장적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남성은 억압하고 여성은 핍박 받는다'로 선명하게 나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가부장의 시각, 즉 남성 중심의 시각이 사회에 존재하고 그것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인 거죠. 그러니까 엄마도 가부장의 시각으로 ‘넌 여자니까 조신하고, 요리를 잘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고, 딸도 여자이지만 동의할 수 있어요. 반대로 남자인 오빠나 아빠가 그건 잘못되었다고 분노할 수도 있죠. 'Cheer Up'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작사가의 가부장적인 시각에 대해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면, 여성이지만 가부장의 시각을 가진 거죠."

-한 학교 수업 시간에, 여성의 병역 의무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여성이 병역 의무를 지지 않는 것은 남성에 대한 ‘차별’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토론이 뜨겁게 이어졌습니다. B양은 여자가 군대에 가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이 정말 양성 ‘평등’인지, 무엇이 옳은 기준인지 혼란스러웠고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고 해요.
"여성이 페미니즘 운동으로 '군대에 가지 않을 권리'를 얻어낸 게 아니잖아요. 여성이 징집 대상이 되지 않는 군대를 누가 만들었는지부터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군대는 남성중심주의예요. 징집 대상을 남성으로 삼고 미성년자, 장애가 있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부적격하다는 기준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페미니즘은 이 남성중심주의를 타파하자는 거고요. 실제로 한 여성이 헌법소원을 했어요. '여자도 군대를 보내 달라'고 했는데 거부당했죠."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에 동의한다면 '남성은 군대에 갈 수 있는 1등 시민, 여성은 2등 시민'이라는 생각을 지녔다는 것이고, 따라서 '여성은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얌체야!'라고 공격할 수 없는 거죠. 남성중심주의의 군대가 여성을 군대에 갈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박제했으니까요. 그래서 여성을 하등하다고 여겨 여성에게 내어주지 않은 가부장제의 의무부터 따르고 권리를 주장하라는 말은 지독히 모순적인 거예요. 여성도 군대에 가지 않으니까 단순히 이득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여성인 나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고요. 즉 병역의 의무는 여성이 아니라 헌법과 국방부에 따져야 하는 문제죠."

-페미니스트인 C양은 소논문을 작성하면서 '여학생의 경우 사회적으로 민감하고 껄끄러운 주제에 더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며, 이런 주제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비율이 남학생보다 더 높다. 반면 남학생의 경우 비교적 과도기적 상태다'라는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실제 조사를 통해 결과를 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B양이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편향적인 의견을 제시했다는 비난을 친구로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페미니스트니까 편향됐다'는 주장 자체는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상대도 편향된 거죠. 조사를 통해 결과를 도출 했으니 근거가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B양을 공격하고 있으니 오히려 편향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상대인 거죠. 개인은 자신만의 '렌즈'가 있어요. B양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렌즈를 지니고 있고, 상대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결과가 나올 수 없다고 믿는 성차별주의적인 렌즈를 끼고 있는 거죠. 이처럼 페미니즘은 내가 지니고 있는 생각, 특히 사회에서 비롯된 기준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페미니스트는 저런 식의 공격을 자주 받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검열에 사로잡히기 굉장히 쉬워요. '내가 객관적이지 않은 건가?', '잘 모르는 건 아닌가?', '좀 더 알고 나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압박 받는 거죠. 그렇다고 입을 닫으면 안 돼요. 일단은 입을 떼야 해요. 정말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가다듬으면 되죠. 정희진 선생님이 쓴 『페미니즘의 도전』에 보면 '여성주의는 여성이 무조건 맞다는 게 아니라, 남성의 시각 역시도 주관적임을 말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나와요. 이처럼 남성적 시각이 표준이고 객관이라고 여기는 생각에서 한 발짝 물러나라는 게 페미니즘이에요. 무엇보다 B양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예요. B양과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B양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B양을 지지해 주고 같이 맞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들과 연예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연예인의 외모에 대해 남성 보다 여성에 대한 잣대가 더 엄격하다는 걸 느꼈어요. 'TV에 나오는 여자라면 당연히 예뻐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거죠. 심지어 어떤 방송사는 남성 앵커는 기자 중에 실력과 능력으로 뽑는 반면, 여성 앵커는 아나운서 선발 시험을 통해 결국 '예쁘고 보기 좋은' 여성을 뽑는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제 주변에 실제로 앵커가 되는 친구들이 있어요. 정말 예쁘고요. 근데 비정규직이에요. 반면 남성은 정규직인 경우가 많죠. 여성은 3개월 내지 1년 만에 갈아 치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더 예쁘고 어린' 여성을 뽑겠다는 거죠. 반면에 정규직인 남성은 경력이 쌓여요. 여성도 50대, 60대가 되도록 앵커를 할 수 있다면 경력이 쌓이고, 남성과 똑같이 잘 할 거예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남성은 기본형 인간이고 표준이니까 '남성성'으로 평가되지 않아요. 그래서 남성의 나이듦은 '연륜'으로 이야기 되는 반면, 여성의 연륜은 인정받지 못해요. 똑같이 앉아있어도 여성은 '예쁘고 어리다'는 '여성성'으로 평가를 하니까요."

"이처럼 여성은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게 마이너스이고, 남성은 플러스인 상황은 정말 잘못된 거죠. 그런데 이런 잘못된 가치관이 사회에 굉장히 만연해요. 페미니즘은 '연예인이니까, 방송에 나오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게 어딨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여성도 남성도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기준을 버리고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자는 거죠."

여성들의 경력 단절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D양은 어느 날 아버지와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고용주인 D양의 아버지는 "출산휴가와 육아휴가를 보내야 하는 여자들을 고용할 바에는 남자를 채용 하겠다"고 주장하셨죠. 이에 대해 D양은 아버지의 대답이 비윤리적이지만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이라는 생각에 반박할 수 없었는데요.
"고용주의 행동이 무조건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출산휴가랑 육아휴가를 보내는 것이 더 이득이에요. 기업 입장에서는 여성이 몇 년 만 일하다가 출산을 하면 해고해야 하니 기껏 키워둔 인재를 잃는 게 아까우니까 남성을 처음부터 쓰겠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오히려 기업은 일 잘하는 여성 직원을 뽑고 적절히 출산휴가를 쓰게 해서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득 아닌가요?"

"20대 여성 10명 중 9명이 결혼하지 않겠다는 조사 결과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괜찮은 남자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혼자 사는 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죠.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방증이에요. 회사 한 곳만 이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가 똑같이 근시안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기업과 국가를 포함한 사회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거죠. 굉장히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은 열심히 배웠고 능력도 있는데 출산과 육아 휴가를 보장받지 못하니까 출산과 결혼을 포기하는 거죠. 근데 국가는 당황스러워 해요. 자기들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형성해 놓고서 말이죠."

글=노소영·임다빈·최수영(고양국제고 2) TONG청소년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도움=김재영 인턴기자 tong@joongang.co.kr
일러스트=우유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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