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엄마' 남편 "내 아내는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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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 14층에서 투신자살한 30대 주부 손모씨 사건의 여파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비정한 엄마'라는 비난과 '구조적 가난이 낳은 비극'이라는 동정 여론 속에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 가출한 것으로 알려졌던 손씨의 남편 조모씨. 최초 언론 보도와 달리 그는 그런 무책임한 가장이 아니었다. 다니던 가구공장이 부도가 난 뒤 지방에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막노동으로 날품을 팔러 내려간 것일 뿐. 여성중앙 8월호에 실린 그와의 단독인터뷰 전문을 소개한다.

7월 17일 제헌절 휴일 오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세 자녀와 아파트 14층에서 몸을 던진 30대 주부의 자살 사건이 전국을 충격과 경악 속으로 몰아넣었다. 비난과 동정 여론이 언론사로 빗발치던 18일 밤, 휑한 빈소에서 넋을 놓고 있는 남편을 만났다.

-"3일 전 술 한 잔 사달라고 하더니… 애들 너무 좋아해 다 데려간 거요?"-

인천 세림병원 영안실을 찾았을 때 10여 명의 친지들은 취재진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빈소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는 상황. 영정 사진 대신 엄마와 세 자녀의 이름이 덩그러니 적힌 하얀 지방만이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말해주었다.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향 친구들과 손정숙씨(34.가명)의 가족들 그리고 조범수씨(34.가명)의 가족들은 언론보도로 또 다른 상처를 입은 듯 취재진들에게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인천시 서구 가정동 1700만원짜리 전세 아파트에 살던 주부가 실직한 남편이 가출한 뒤 3000만원의 카드 빚 독촉에 시달리다 생활고를 비관, 근처 고층 아파트 14층 계단에서 일곱 살 첫딸과 다섯 살 아들을 먼저 떨어뜨린 뒤 세 살배기 막내를 끌어안고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 보도 내용이었다.

"자식은 있나요? 아니면 그 심정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잠시 빈소를 나온 손정숙씨의 친구는 손씨가 느꼈을 법한 고통을 말하는 듯했다. 손씨는 1년 전만 해도 밝고 씩씩한 여자였고 자존심이 아주 강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끔찍이 아끼던 여자였다고.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생활이 어려워도 친구들에게 말을 잘 하지 않았다며 홀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을 손씨를 안타까워했다. 손씨가 아이들에 대해 어떤 꿈이 있었는지 물었다.

-비정한 엄마 아니다,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꿈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겠죠. 부모는 누구나 아이를 잘 기르고 싶어해요.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어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하고 싶어하는 엄마였죠. 그런데 그 길이 다 막혀버린 것 같으니까 그만큼 받은 스트레스도 컸을 거예요."

모든 가능성이 막혀 있다는 절망감이 손정숙씨와 그녀의 세 자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얘기이다. 손씨의 남편 조범수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의 가족들은 그가 빈소에 없다고 했다. 3년 전 가구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고향친구들은 조씨를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언론 보도처럼 가출한 적도 없고, 무책임한 아버지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니던 가구공장이 부도가 난 뒤 조씨는 지방에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막노동으로 날품을 팔러 내려간 것일 뿐이었다는 것.

빈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씨의 형은 밤이 깊어지자 강경한 태도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형의 말에 따르면 조씨는 '애들 보고 싶다' '나만 혼자 살아서 무엇하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조씨의 형에게 질문을 계속하자 죽은 손씨의 언니가 기자를 몸으로 밀어냈다. 손씨의 언니는 언론에서 자신의 동생을 '비정한 엄마'라고 보도한 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부정했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조씨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빈소 안이 한결 차분해졌을 때 누군가 방에서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가 조범수씨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얼굴이 조씨일 테니까. 기자는 빈소를 나서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힘에 부친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내부를 다 비워낼 듯 반복되는 격한 구토, 절규인지 비명인지 모를 제어되지 않는 소리. 기자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가족의 비극에 대해 세상이 떠들썩하게 책임을 추궁하고 무책임한 아버지, 비정한 어머니, 가여운 아이들을 말한 뒤 곤히 잠들어버린 새벽, 홀로 살아남은 자는 비좁은 화장실에서 마치 자신의 삶을 게워내는 듯 고통스럽게 들썩이고 있었다.

얼굴을 씻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만 해도 될 텐데 그는 나쁜 꿈에서 깨어나려 발버둥치는 아이처럼 연거푸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기자가 건넨 첫인사를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갔다. 빈소에서 밤을 새웠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뜻밖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적어도 기자를 보는 조씨의 눈에서는 '무책임한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오래 기다렸다는 기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룻밤에 온 가족을 잃은 조씨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좋은 데 갔으면… (아내가) 애들 너무 좋아해서 애들 데려갔는데… 저도 아이들을 좋아했고…."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그의 첫마디는 끝을 맺지 못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데려갔다는 조씨의 말 속에는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더 이상 아이들을 볼 수 없게 한 아내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 그러나 그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하기에 아내를 이해하려는 마음, 또한 사람들이 아내를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혼재해 있는 듯했다.

"겁도 많은 사람이 그 높은 곳에 올라갈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카드 빚 독촉 전화가 온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고 한 번도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뜻밖이었다. 부부가 모두 신용 불량자가 된 처지에서 남편에게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씨는 아직도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평소에 그가 본 아내의 모습은 차분하고 온화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의 정은 두터웠기에 그에게는 더더욱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고. 힘겨운 그의 말 속에도 아내에 대한 애틋함은 숨겨지지 않았다. 손씨가 친구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암시한 적은 있었으나 남편에게는 힘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전긍긍 공사장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는 남편을 걱정해 손씨는 홀로 정신적 부담을 지기로 한 것이었을까.

"3~4일 전인가 피곤해서 잠자리에 누웠는데 저를 깨우더니 요즘 잠이 잘 오질 않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 술을 좀 사오라고 해서 나가서 사왔어요. 술을 좀 마시게 했더니 금방 잠이 들더군요. 다음날 아침 그날은 잘 잤다고…."

-힘들다는 말 한번도 하질 않아 전혀 예감하지 못한 비극-

그런 일이 있었지만 조씨는 아내가 그토록 큰 심적 고통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안타까운 조씨의 한숨은 마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손정숙씨의 친구는 사실 손씨가 사건이 있기 열흘 전부터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기자에게 마음을 누그러뜨린 손씨의 언니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마도 동생이 최근 심적 괴로움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 생활고를 감내하던 그녀가 심리적으로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극단적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말로 들렸다.

가출을 한 것이 아니었냐고 묻자 남편 조씨는 15일 전까지도 집에 있었고 15일에 대전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해서 내려간 것뿐이라고 했다. 그 전에도 날품을 팔 일이 생길 때마다 지방에 내려간 것이라고. 언니 또한 동생이 생전에 파출부를 했다는 둥 허드렛일을 했다는 기사는 오보라고 잘라 말했다.

어린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가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을 맡기는 게 돈이 더 들었을 것이라고. 기자가 조씨에게 아이들에 대해 질문했을 때 조씨는 대답을 거의 하지 못했다.

"큰딸은 제가 자고 있으면 늘 제 곁으로 와서 자곤 했어요.… 미술을 잘했고… 아내는 유치원에 한 번도 애들을 빠지지 않게 하고 그랬는데…."

조씨가 말을 잇지 못하자 손씨의 언니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손씨는 생전에 아이들과 부모에게 유난히 잘했다고 했다. 손씨는 아무리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아이들을 꼭 데리고 갈 만큼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했고 비정한 엄마는 절대 아니었다고.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자기가 다 거둘 수가 없으니까 다 데리고 간 것 같다며 손씨의 언니는 눈물을 흘렸다.

"다른 집 애들도 이렇게 되면 어떡해요."

조씨에게 한달 수입이 어느 정도였는지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기자는 조씨가 자존심이나 프라이버시를 생각하는 줄 알았으나 그는 자신과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가정에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손씨의 언니는 사회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도저히 생활이 안 돼서 보조를 받고 싶어 찾아가도 젊은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무슨 보조를 받겠다는 것이냐고 거부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 뒤 조씨는 괴로운 빛을 역력히 띠었다. 앞으로의 생활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애들 보러 가야죠. 애들이 기다리는데…."

기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조씨는 같은 대답을 했고 그 다음에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간 아이들과 아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달라는 부탁에 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사랑했다는 말…."

끝내 조씨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가족을 위해서 공사장에서 날품을 팔던 서른넷의 남자. 그 가난한 아버지는 가난 앞에서도 굳건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그 소녀를 위해서, 너무나 사랑하는 예쁜 아이들을 위해서 고된 노동을 하느라 몸은 어느새 탱크처럼 단단해졌다. 그러나 어이없이 가족을 잃은 지금 그 건장한 체구의 남자는 이제껏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면서 무너지듯 울었다.

여성중앙=김강숙 기자
사진=원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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