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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 탈출…납치극 8년2개월|최·신씨 부부 피랍에서 오늘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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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납치된 것은 8년 전인 78년. 1월에 최씨가 북괴 공작에 유인 돼 홍콩에서 납치됐고 6개월 후인 7월 신씨가 역시 홍콩에서 납치됐으나 그들의 행방이 공식 확인된 것은 6년이 지난 84년.
국가 안전 기획부가 두 사람 가족을 해외로 유인해 납치하려던 북괴의 음모를 적발해 두 사람의 피랍 경위와 피랍 후 행적을 확인, 발표했다. 자신들의 파렴치한 문화 예술인 납치 국제 공작 활동을 백일하에 폭로 당한 북괴는 그 42일 후인 5월19일 평양 인민 문화 궁전에서 두사람의 「의거 입북」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평소 북한과 김일성을 동경, 흠모해오던 끝에 자진 월북한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로부터 1년10개월 만인 지난 13일 두 사람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탈출 드라머를 결행, 그날의 회견이 강요된 연극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다음은 피랍에서 탈출까지 최·신 부부의 8년2개월 드라머.
◇최은희 납치=78년1월14일 홍콩에 체류 중이던 최은희는 하오 5시쯤 북괴 공작원 이상희 (60·여)에게 유인돼 홍콩에 정박 중이던 공작선 능라도호로 납치됐다.
최의 납치는 김정일의 직접 지휘에 의한 예술인 납치 공작의 일환으로, 김정일은 77년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기도 실패 직후인 8월초 대남 공작 담당부 부장 강해룡 (60)에게 최은희·신상옥 납치 지령을 내렸으며 강은 홍콩 거점 공작책 이상희에게 공작을 지시했다.
이는 신 필름의 홍콩 지사장 김규화 (64·간첩죄로 징역 15년 확정 복역 중)를 포섭, 홍콩의 영화 브로커 왕동일 (59)을 7천 달러에 매수했다. 이는 77년9월 왕을 서울에 보내 12월 홍콩 카니벌 참석 교섭을 진행하다 김규화가 10월중 홍콩의 영화 제작 업자인 금정 영업 공사 대표 시조흠 (49)으로부터 최은희에 대한 초청장을 입수하자 11월 왕동일에게 카니벌은 취소하는 대신 영화 『양귀비』에 주연으로 출연토록 교섭하도록 했고 최가 응낙하자 11월말 왕이 최에게 초청장과 비행기표를 우송했다.
최은희는 78년1월11일 하오 7시 CPA기 편으로 출국해 같은 날 하오 10시쯤 홍콩에 도착, 왕과 김규화 등의 영접을 받아 프라마 호텔 1612호실에 투숙했다.
13일 최는 김규화·이상희·이영생 부부 등과 저녁을 먹고 이상희의 안내로 호텔로 돌아갔으며 이는 사업을 하는 남편이 최은희를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유인, 14일 하오 만나기로 약속을 받은 뒤 14일 남편이 유람선에서 기다린다고 속여 미리 대기 중이던 북괴 공작선으로 최를 납치하는데 성공했다.
공작선은 14일 밤 홍콩을 출항, 해주항에 입항했으며 김정일은 대남 공작 담당 비서 김중린, 연락부장 정경희를 대동하고 해주항까지 직접 나와 최를 마중했으며 그의 벤츠 승용차에 태워 평양까지 동행했다.
◇신상옥 납치=최은희 납치 성공 13일 뒤인 78년1월27일 하수인 김규화는 서울의 신상옥에게 전화를 걸어 『최은희가 실종됐으니 홍콩으로 급히 오라』고 유인했다.
신은 다음날 홍콩으로 떠나 미국·일본·대만·싱가포르·인도네시아·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해외 영화계 친지 등을 통해 최의 행방을 탐문했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78년7월14일 홍콩으로 다시 돌아가 최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했다.
7월19일 신을 뒤따르며 기회를 엿보던 북괴 공작원은 홍콩에서 신을 유인, 납치해 공작선 편으로 북으로 데려갔다.
◇가족 납치 기도=북괴는 83년12월 일본의 공작책 김경식 (62)을 통해 최·신 가족의 해외 유인, 납치를 기도했다.
김은 평소 신과 친분이 있는 일본인 영화 평론가 「구사가베·규우시로」 (초벽구사랑·66)를 동원해 영화 감독 「니시따·데쓰오」 (서전철웅·38)를 연락 공작원으로 포섭, 서울에 침투시켰다.
「니시따」는 12월25일 서울에 들어와 27일 서울 운니동 운당 여관에서 신의 가족과 만나 최·신의 육성 녹음 테이프·이북에서의 사진·자필 메모지 등을 건네 주었으며 신은 오수미에게 보낸 녹음에서 자신과 오 사이에 낳은 두 들을 미국의 친구 김인환 (60·의사·뉴저지주 거주)에게 양자 형식으로 보내 달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84년2월17일 「니시따」는 두번째로 서울에 들어와 신이 조카 신명길 및 오수미에게 보내는 서신과 재일 공작 책 김경식이 신명길에게 보내는 서신 등을 전달하고 2월20일 출국했다.
다음날인 2월21일 재미 교포 김인환의 처 김인자가 입국, 신의 자녀 2명의 양자 입양 문제를 신의 형 신태선 등과 협의했으며 김은 신의 가족에게 미국에서 신의 국제 전화 2회, 서신 1회를 받았고 모스크바로 전보를 쳐 신을 만나기로 했다고 전했다.
◇안기부 발표=국가 안전 기획부는 신의 가족들을 상대로 진행된 이 같은 북괴의 음모를 적발, 84년4월2일 두 사람의 피랍 경위·피랍 후 행적 등과 함께 발표했다.
또 증거물로 두 사람이 가족들에게 보낸 사진과 녹음 테이프 등을 공개했다.
이로써 78년 홍콩에서 행방불명된 뒤 사망설·북한 체류설 등 추측뿐 「실종」으로 처리됐던 국제적 미스터리 사건은 진상이 밝혀졌고 이들의 납치가 북한 김정일의 직접 지휘에 의한 계획적인 공작 활동이었음이 드러났다.
공개된 두사람의 사진 중 최은희의 것은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쌍묘인 현릉과 정릉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었으며 신의 사진은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또 녹음 테이프는 유고제 경음악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했으며 메모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힐튼 호텔 칵테일 바의 것이었다.
녹음은 최의 것이 3회, 신의 것이 25회나 수정 편집된 것으로 밝혀져 북괴가 두 사람의 강제 납치를 은폐하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뚜렷했다.
◇재북 활동=북에 납치된 최와 신은 평양시 삼성 구역 대동강변에 있는 철봉리 초대 소에서 각각 분리 수용 돼 철저한 세뇌 교육을 받았다.
협박과 회유를 병행한 세뇌 교육으로 북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북에서 영화 예술 활동에 종사하도록 강요했다.
김정일은 또 최은희를 비공식 연회에 불러내 유희 대상 또는 말동무 노릇을 시켜왔다.
두 사람이 배에서 영화 활동을 시작한 것은 79년.
84년4월 국내에서 안기부의 발표가 있자 북괴는 자신들의 납치 극을 은폐하기 위해 5월19일 평양 인민 문화 궁전서 두 사람의 기자 회견을 열었다.
회견장에 나온 최·신 부부는 『자신들은 북으로 납치된 것이 아니며 그 동안 김일성 수령과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을 무한히 흠모해 왔으며 몽매에도 잊지 못할 「인민의 낙원」「영광스러운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찬란한 피바다 예술의 조국」을 찾아 의거 입북했다』고 앵무새처럼 중얼거렸다.
84년 한해에 두 사람은 『탈출기』등 4편의 극영화를 만들었다.
◇망명=2월14일부터 25일까지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영화제에 두사람은 16명의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북한은 이 영화제에 신상옥 감독의 세 작품 『심청전』『춘향전』『소금』 등을 비 경쟁부문에 출품했었다. 그러나 한 작품도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영화제 기간 중 두 사람은 우리 대표단과 여러 차례 만났으며 14일 개막식에서는 김지미씨와 2시간 동안이나 따로 만나 얘기를 나누었고 김씨의 『이제 그만 돌아 오라』는 권유에 크게 동요하는 빛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그새 몹시 늙고 지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영화제가 끝난 뒤 영화 촬영차 머무르고 있던 헝가리로 돌아갔다가 3월12일 밤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 13일 미국 대사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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