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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당신] 손주 이름이 깜박깜박 나이 탓이라 생각했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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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혈압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 뇌의 소혈관이 막히거나 터진다. 지금까지는 뇌졸중 같은 대혈관 질환에 비해 마비 정도가 덜하고 사망률이 낮아 과소평가됐지만, 소혈관 질환이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은 낮지 않다.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심각성이 재조명되고 있다.

젊음이 주어진 것이라면 늙음은 이뤄내는 것이라고 한다. 건강이 딱 그렇다. 10여 년 전만 해도 나이 따라 기억력이 감퇴하고 걸음걸이가 느려지는 건 자연의 섭리로 여겼다. 그러나 인지·보행·우울·배뇨 장애가 뇌 속 실핏줄인 ‘소혈관’의 이상에서 비롯됐다는 게 밝혀지면서 이제는 노인증후군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뇌졸중(중풍)을 유발하는 대(大)혈관 질환에 비해 소(小)혈관 질환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전문가들은 시간 차이가 있을 뿐 소혈관 질환이라는 머리 속 시한폭탄을 미리 관리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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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에 사는 김명연(68·가명)씨는 얼마 전 손자를 안아올리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평소 끔찍이 아끼던 손자 이름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잖아도 요즘 들어 걸음걸이가 전보다 느려진 김씨는 ‘이제 정말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김씨는 최근 건강검진 결과 그 원인이 단순히 나이에만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담당의사는 김씨에게 뇌 MRI 사진을 보여주며 ‘소혈관 질환’이 그 원인이라고 했다.

커버스토리 고령화 사회 복병 '소혈관 질환'?

인지장애·보행장애·우울증 등 유발
엄밀히 말해 소혈관 질환은 동맥, 그중 소동맥에 문제가 생기는 질환이다. 혈관은 마치 나무와 같다. 두꺼운 줄기에서 가지로, 다시 잎사귀로 갈라지며 온몸에 혈액을 전한다. 심장에 가까울수록 굵고 튼튼하고, 멀수록 가늘고 약해진다. 소동맥은 줄기(대동맥)와 잎사귀(미세혈관) 사이의 ‘가지’에 해당한다. 심장은 분당 60~70회를 박동하며 5L의 혈액을 내뿜는데, 손끝·발끝 미세혈관까지 혈액을 보내야 돼 이때의 압력은 매우 높다. 혈관벽이 두껍고 튼튼한 대동맥은 이 압력에 잘 버티지만, 소동맥은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서히 망가진다. 얇은 고무호스에 많은 물을 반복해 흘려보내면 너덜너덜해지다 언젠가 새거나 터져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소혈관 질환이 주로 문제가 되는 곳은 뇌 쪽이다. 다른 장기에서는 잘 발생하지도 않을뿐더러 문제가 생겨도 별다른 증상 없이 넘어간다. 소혈관 질환이 뇌에 특히 위험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로 뇌에는 대동맥에서 갈라지는 소동맥이 매우 적다. 다른 장기의 경우 같은 압력이라도 대동맥에서 많은 소동맥으로 갈라져 그 압력을 적절히 분산한다. 보통 혈관이 줄기 하나에서 많은 가지가 뻗어나가는 구조인 데 비해 뇌혈관에선 뻗어나가는 가지가 적다. 당연히 각 혈관에 걸리는 부하가 크다.

둘째로 뇌혈관은 우회로가 없다. 다른 장기는 소동맥이 막히거나(경색) 터지더라도(출혈) 근처의 다른 소동맥과 미세혈관을 통해 혈액을 충분히 공급해 기능을 유지한다. 그러나 뇌는 각 부위에 들어가는 혈관이 소동맥 하나뿐이다. 공급로가 막히면 혈액을 전달할 수 없다.

셋째로 뇌세포는 조그마한 손상에도 매우 예민하다. 혈액 공급이 5초만 중단돼도 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한다. 미세한 상처만 나도 마비나 장애, 심지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장기의 세포는 손상에 비교적 강하다. 간, 위, 장 같은 기관은 수술이나 이식을 위해 일부를 떼어내도 기능을 유지하고 회복한다.

중요한 건 손상 정도가 아니라 손상 부위다. 부위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이 다르다. 망가진 소동맥의 위치가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부위라면 인지장애, 운동능력을 담당하는 부위라면 보행장애가 나타나는 식이다. 이 밖에도 우울증, 배뇨장애, 흡인성 폐렴이 소혈관 질환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이기정 교수는 “혈관이 얼마나 손상됐는지보다는 손상된 부위가 어디인지가 중요하다”며 “경색이 어디에 생겼는지에 따라 혈관성 치매가 올 수도, 혈관성 파킨슨병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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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여명, 뇌졸중과 불과 1년 차
소혈관 질환은 증상이 비교적 가벼운 편이다. 대혈관 질환에서 발생한 뇌경색·뇌출혈은 심각한 수준의 마비가 매우 빠르게 온다. 큰 후유증을 남기거나 사망할 수 있다. 반면에 같은 뇌경색·뇌출혈이라도 소혈관에서 발생하면 진행 속도가 매우 느리다. 뇌에 전달되는 혈액이 감소하면 영양분이 부족해진 뇌세포가 죽기 시작하고, 결국 회백질이 백질로 바뀌며 각종 장애가 서서히 나타난다.

소혈관 질환 자체는 겉으로 드러난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뿐 장차 증상이 심각해질 위험은 아주 크다. 대표적인 예가 ‘무증상 뇌경색’이다. 일반 뇌경색과 마찬가지로 뇌의 혈관이 막힌 상태지만 마비 같은 증상은 없다. 마비를 일으키는 뇌 부위에 경색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증상 뇌경색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뇌졸중 발생 위험이 5배, 치매 발생 위험이 최대 3배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60세 이상 우울증 환자 절반에서 무증상 뇌경색을 발견했다는 보고도 있다. 학계에선 노인 10명 가운데 2~3명이 무증상 뇌경색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의학계에선 지금까지 소혈관 질환의 심각성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같은 뇌혈관 질환이라도 마비 정도가 덜하고, 사망률이 낮아 과소평가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소혈관 질환과 대혈관 질환이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소혈관 질환을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노인병학회지에 게재된 하버드의대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뇌혈관 질환이 없는 사람을 기준(0)으로, 인지기능의 경우 소혈관 질환이 있는 사람(-0.16)이 대혈관 질환이 있는 사람(-0.1)보다 오히려 저하된 상태로 나타났다. 보행 속도와 악력 역시 소혈관 질환이 있을 때 예후가 나빴다. 이를 바탕으로 할 때 양쪽 질환자의 기대여명차이는 9~15개월에 불과했다. 대한고혈압학회 김철호(분당서울대병원 노인병내과) 이사장은 “뇌 MRI가 늘어나면서 10여 년 전부터 소혈관 질환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아직도 문제의식은 낮지만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어 노인층이 많아지면 결국 소혈관 질환이 굉장히 큰 현안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 노화와 달라 … 고혈압 환자 특히 주의를
소혈관 질환의 진단은 쉽지 않다. 뇌 MRI를 찍고서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까지 전조증상조차 없어 일상생활에서 미리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이기정 교수는 “(소혈관 질환이) 인지·보행·배뇨·우울장애와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우연한 기회에 MRI를 찍었던 사람에게서 소혈관 질환이 발견되고, 이들에게 각종 기능 저하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보고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명확히 밝혀진 위험인자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고혈압과의 연관성은 매우 크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당뇨병이나 고지혈증과의 관계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통계학적으로는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김철호 이사장은 “소혈관 질환은 높은 혈압이 오래 지속됐을 때 발생한다”며 “예전엔 혈압을 전혀 관리하지 않아 뇌졸중을 얻고 부랴부랴 병원을 찾는 환자가 많았지만 최근엔 혈압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해 오랫동안 높은 혈압을 유지하다 소혈관 질환을 얻는 환자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위험인자는 나이다. 의학계에선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3~5명은 소혈관 질환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승훈 교수는 “증상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중등도 이상으로 봤을 땐 노인의 30%, 경도까지 포함했을 땐 절반 가까이 소혈관 질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소혈관 질환을 일반적인 노화 현상으로 볼 순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철호 이사장은 “소동맥이 노화하면 혈관의 탄성이 떨어지는 데 그치는 반면, 소혈관 질환을 앓게 되면 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힌다”며 “소혈관 질환으로 인한 인지장애, 보행장애 등을 일반적인 노화 현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라고 강조했다. 이승훈 교수는 “소혈관 질환은 매우 미세한 수준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MRI로도 발견하기 어렵다”며 “MRI에 찍힐 정도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말했다.

김진구 기자 kim.jin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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