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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 사회주의활동 편「자유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방세계 정치인중「팔메」수상만큼「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언행이 일치하며 활동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내 비록 부유한 가정출신이지만 나는 노동운동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자신이 밝혔듯이 그는 학생 때부터 사회주의 정치활동에 참여해온 만년 「이상주의자」였다.
정치적으로도 온건한 중도우파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서구사회주의의 국제적인 조직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지도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가장 완벽한 사회복지 국가인 스웨덴수상으로서보다는 서방공업국과 제3세계 빈곤 국간의 부를 분배하자는「브란트」위원회의 멤버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러져 왔다. 특히 평화주의자로서의「팔메」수상은 미소의 핵 정책, 강대국정치에 항상 주도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36세 때인 1963년 사회당정부의 각료가 됐던 그는 수상에 오르기 1년 전인 1968년 교육상시절 미국의 월맹 북폭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했고 수상 때는「닉슨」대통령을「히틀러」에 비유, 미국대사가 소환되는 소동을 빚게 했다.
대학교육을 미국에서 받아 한때 스스로를『미국성향의 인간』 이라고 자칭했던 그는 1960년대이래 서구정치인중 가장 강력한 미국정책 비판자였다.
1969년 42세 때 유럽에서 최연소로 수상직을 맡은「팔메」는 그의 이상만큼이나 성품이 소탈해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수상에 재직하면서 그가 늘 자랑했던 것은 경호원 없이 다닌다는 것이었다. 주말에 개인용무로 외국 나들이를 할 때면 그는 손가방 하나만 들고 일반여행객에 섞여 훌쩍 떠나곤 했다. 여행 떠날 때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구두밑창이 다 떨어진 모양이 카메라맨에게 잡혀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그의 인간성을 나타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체신-공보장관으로 있던 1966년 섹스영화에 출연했던 일이다.
그는 당시 이 영화가 섹스의 자유와 비폭력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잠깐 얼굴을 비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팔메」가 남긴 진 기록은 자신은 그토록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44년간 집권했던 사회당이 76년 선거에서 패배했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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