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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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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3월이 오면 우리는 다시 3·1운동을 생각한다.
일제의 침탈에 의해 나라를 잃고 주권을 잃은 우리 민족이 민족의식을 통해 한데 뭉쳐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나섰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국토분단의 해소와 민주화의 염원이 민족전체의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특히 3·1 독립운동의 정신은 유난히 빛을 발하게 된다.
67년전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졌던 민족의 함성은 「대한독립만세」로 집약되었지만 그 같은 민족의 일체화된 절규는 뚜렷한 정신의 소산이었다.
그 첫째는 민족주의였다. 이민족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민족의 민족적 자존을 무시하는 것이기에 이는 기본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는 민주운동이란 점이다. 비록 한번도 공화제정치를 경험한 바 없이 대부분 왕조치하의 귀족정치에 피해를 받아오기만 한 국민들이었지만 국가의 자주독립을 실현하고자하는 열망가운데 국민주권의 이상도 아울러 실현해야 한다는 열망을 표출했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식민지적 수탈에 대항하여 자신의 생존권을 지기고자 했을 뿐 아니라 군국주의·강권정치를 부정하고 민주·민권주의체제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저항의지가 뚜렷하게 표출되고 있다.
특히 그와 같은 민족·민주의 대의가 이름 없는 남녀노소 일반대중의 순수한 정의추구의지로 집약되어 표출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3·1운동의 정신이 그때 갑자기 형성되어 나타났다가 일제의 탄압에 의해 금방 소감해 버리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3·1독립운동 자체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 등을 계승한 민족운동이었지만 이것은 다시 3·1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민족운동의 단계로 지양되었다.
상해에서 성립된 임시정부가 「민국」 을 표방하고 나서게 되고 만주를 비롯한 독립군의 무력항쟁체계가 비로소 형성될 수 있었다.
3·1운동은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 평화적 방법이 대종을 이루고 있어 일제의 무력탄압에 의해 표면상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부터 형성된 민족운동의 새 방향은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형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3·1운동에서 표명된 정의·인도·생존·존영의 대의가 다만 이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애쓴 우리들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의 소산이었다.
사실상 우리가 오늘 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선조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식민통치를 극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획득할 수 있게 한 3·1 독립운동의 의미는 이 민족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다.
지금은 비록 이민족의 식민지배는 없어졌지만 또다시 민족의 정의·인도를 배반하고 자유민주의 대의를 침해하며 민족통일을 저해하는 일이 있다면 결코 민족과 역사 앞에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3·1독립운동 67주년을 맞으며 새삼 그 봄에 피어올랐던 민족의 맑은 정기가 오늘에도 맥맥히 살아 이어지길 기대한다.
특히 그때 한데 뭉쳐 일어났던 폭발적인 민족 에너지는 일제 식민사관을 비롯한 통치이념에 압도되어 위축되고 왜곡되었던 우리 민족의 강인성을 소생시킨 한 계기도 되었던 만큼 이제 이를 다시 개화·진전시키는 학자들의 노력도 촉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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