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문인 5인의 공동 수필집 '세월의 향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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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사르트르의 영원한 동반자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는 62세 되던 해인 1970년 출간한 '노년'에서 "늙는다는 것은 개인이 시간과 갖는 관계를 변경시킨다. 늙는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그 자신의 역사와 맺는 관계도 변경시킨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에 대한 들끓는 열정과 번민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60~70대에 이른 여류 문인 네명이 지난 16일 남산 기슭 문학의 집에서 오랜만에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시인 김남조(76)씨와 김후란(69)씨, 소설가 한말숙(72)씨와 희곡작가 전옥주(64)씨가 주인공으로 이들은 최근 공동 수필집 '세월의 향기'(솔과학)를 펴냈다. 소설가 박완서(72)씨도 수필을 보탰지만 개인 사정으로 이날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보부아르 식으로, '늙음'이 문학과 세계에 대한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변경시켰을까. 2년 전 문학의 집으로 바뀐 2층 양옥은 과거 안기부장 공관이었다. 세월의 파도에 씻긴 이들의 외모는 옛날보다 둥글둥글하다.

한씨가 먼저 "나이 든 사람들의 생각을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에 책을 내게 됐다. 예전 우리들은 문학에 대한 순수함, 경외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 작가들은 돈이나 명예, 이름을 날리는 데 너무 신경쓰는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

김남조씨는 "지난 세월은 덧없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순간 순간 소중하고 의미 있다. 상처를 입었고 상처가 아문 후에는 깨달음이 있었다. 수필집은 세월에 씨 뿌려 거둔 결과물, 다섯사람이 나름대로 가꿔온 목소리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을 건너 본 사람이 깊이를 알듯 인생을 건너 본 사람들의 생각을 담은 책"(전씨) "오래 묵은 포도주 같은 인생의 글들이 담긴 책"(김후란씨)이라는 '책자랑'이 이어졌다.

늙는다는 게 무엇인지, 어떤 관계 변경을 가져오는지 물었다. 김후란씨는 "네명 모두 문단 연조가 40~50년 됐다. 하지만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아직 건강하고 젊다"는 생각이다. 한씨는 "파릇파릇했을 때는 얼마나 주책바가지였는지. 나이들면서 정신적으로 풍족해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남조씨는 "그래도 나이 들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보다 여러 가지 능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 서글퍼진다. 젊었을 때는 감정이 너무 자주 아팠다. 신경의 유혈이 있었다. 나이 들어서는 안도감이나 편안함, 작은 것들에서 위안을 자주 맛보게 된다"고 변화를 얘기했다.

김남조씨는 "앞으로 50년을 살아야 할 젊은 연인들을 보면 그들 앞에 놓인 힘들고 가난한 길이 떠올라 연민을 느끼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얘기는 문학과의 관계, 후배 작가 작품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김남조씨는 "시와 동거한 지 50년 만에 화해에 도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문학에 수없이 참담한 패배를 당했는데 지금은 문학 안에서 편안하다"는 것이다.

김후란씨는 "요즘 젊은 세대의 언어구사는 무척 뛰어나지만 우리 감각으로 볼 때 우려되는 점이 있다. 말이 너무 난삽하고 합당하지 않은 표현이 많다.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을 줄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김남조씨는 "젊은 작가들도 가슴 터질 것 같은 열정과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열심히 작품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6.25 등 고난의 시대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 비해 젊은 세대는 체험의 역량이 작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작가들은 압도당할 정도로 말을 능숙하게 다루지만 가슴으로 전달하는 진실성은 조금 더 축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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