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고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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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마르코스」=나는 어찌해야 하겠소?
「랙설트」=깨끗이 단념하시오. 때가 왔소.
이것은 「마르코스」와 미국 상원의원「폴·랙설트」가 주고받은 전화 통화의 한 구절이다.
「랙설트」의원이 영어로 한 말은 더 실감이 난다. 『컷 앤드 컷 클린리』(Cut and cut cleanly).
그때의 시간이 25일 새벽 3시(필리핀시간). 「마르코스」는 수화기 속에서 들리는 시계의 초침소리 같은『컷 앤드 컷』이라는 말을 들으며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그 긴박한 순간에「마르코스」가「랙설트」의원을 찾아 전화를 건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이유를 찾으려면 잠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야 한다.
지난해 가을, 정확한 날짜로는 1985년10월14일「레이건」대통령은「랙설트」의원을 필리핀에 특사로 보냈었다. 그 이틀 뒤에야 이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보아 밀사였다.
이때「랙설트」는『미국 대통령이 지금까지 우방에 전한 어느 메시지보다 강경한 내용』(뉴욕 타임즈지)을 담은「레이건」의 친서를「마르코스」에게 전달했다. 그 속에는「마르코스」가『금전적 이해와 국내 정치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반군(공산게릴라)들과의 투쟁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회고와 함께 『만약 내정 개혁을 하지 않으면 정권이 전복 당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미국의 마지막 최고장이었다.
「마르코스」는「랙설트」의원이 마닐라를 떠나자마자 비상 각의를 소집했다. 그 뒤에 나온 외신은「마르코스」가「레이건」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랙설트」의원이「마르코스」를 만나고 돌아 온지 사흘만인 20일자(85·10) 뉴욕 타임즈지의 사세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해야「마르코스」가 말을 알아듣게 할 수 있을까』(What can make Marcos listen).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사세의 결론이다.
『…결국「계몽된(enlightened)군부」가「마르코스」가 거부해온 민주화로의 전환을 주도해야 될 것이다.』
이쯤 되면「마르코스」가 그 긴박한 시간에「랙설트」의원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미국의 국무성, 국방성. CIA가「마르코스」정권을 내버려두면『제2의 이란』이 된다는 보고서를「레이건」에게 제출한 뒤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것은 미국이 외국의 내정에 개입할 때 보여주는 하나의 공식이다. 먼저 최고장을 보내 귀띔하고 그래도 안들으면 언론을 통해 예고해서 미국 내 언론을 다스리고 비로소 각 국내 여론을 다스리고 비로소 작용을 한다.
1963년 베트남의「고·딘·디엠」정권이 쿠데타로 붕괴될 때도 이「공식」그대로였다.
「마르코스」가 4개월 전 미국의 마지막 최고를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였으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뒤늦게「랙설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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