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올림픽 반세기(60)|김성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몬트리올 올림픽에는 모두 72명(임원22· 선수50)이 나갔다.
종목은 레슬링· 유도· 남녀배구· 복싱· 사격등 5개.
모두 입상가능 종목이었으나 사격은 다음해 서울에서 벌어질 세계선수권대회의 주최국으로서 체면을 고려, 뮌헨때와 마찬가지로 정책적으로 들어가게된 것이다.
또 남자배구의 경우도 당초 체육회가 『상위 입상이 어렵다』고 하여 제외시킬 방침이었으나 『아시아지역대표로 출전권까지 따놓은 마당에 너무하지 않느냐』는 배구협회의 반발이 거세 다시 집어넣게 되었다.
7월3일 상오10시 시민회관 별관에서 거행된 결단식에서 김택수회장은 최재구단장에게 단기를 넘겨주며 선전을 당부했다.
김회장은 사석에서 『뮌헨대회때는 체육회장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책임감도 덜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어떻게든지 좋은 성적을 내야 할텐데 걱정이다』고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올림픽 개막은 7월17일이었으나 선수단은 7일 현지로 향했다.
나는 이때 김명곤 김오중씨와함께 경기 임원으로 동행했다. 나는 76년 2월11일 체육회 정기대의원 총회에서 8년간 맡아왔던 사무총장직을 내놓았으므로 단순한 체육회 이사에 불과했다.
그 전해 태릉선수촌에 개선관을 지을 때 그린벨트 규제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선수촌 직원들이 서울시로부터 고발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사건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퇴했던 것이다. 따라서 몬트리올 올림픽에 꼭 참가해야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대표선수 선발에서부터 훈련까지 다 맡아 추진해 왔던 만큼 체육회가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하나의 짜릿한 역전극으로 기억에 남는다.
올림픽이 개막된지 열흘이 지나도록 단 한개의 메달도 건지지 못해 『노 메달로 끝나는게 아닌가』 불안감마저 감돌 때 비로소 메달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28일 박영철(유도 미들급)이 동메달을 따낸 것을 필두로 30일 장은경(유도 라이트급)이 은 메달,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따냈다.
최종일인 31일에는 전해섭(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의 동메달에 이어 드디어 양정모가 금 메달을 따냈던 것이다. 또 전 선수· 임원이 레슬링 경기장에 몰려간 사이 조재기(유도 무제한급)가 동메달을 1개 더 추가했다.
조재기는 원래 라이트 헤비급에 출전했으나 메달권에서 탈락 해 버리자 비장한 각오로 머리를 빡빡 깎은채 무제한급에 출전했던 것이다.
조는 패자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포르텔리」에게 판정승, 기어이 메달의 꿈을 이루고야 말았으니 그 집념과 불굴의 투혼이 너무도 가상했다.
모두 6개의 메달(금1·은1·동4)을 따낸 한국선수단은 메달집계에서 19위를 차지, 금1. 은1개의 북한(메달집계 21위)을 극적으로 추월했다. 뮌헨에서의 열세를 멋있게 만회한 것이다.
북한은 복싱에서 구용조(밴텀급)가 금, 이병욱(라이트 플라이급)이 은을 따냈다.
레슬링에서 최초의 금메달이 나왔고 유도에서도 재일교포가 아닌 국내선수(장은경·조재기)가 메달을 따내는 등 대단한 수훈을 세웠지만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메달을 따낸 여자배구의 업적은 어떤 의미에선 개인종목 금메달에 견줄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성집>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