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져 간다|신민당의 전격서명개시와 앞으로의 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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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의 잇단『개헌 서명 엄단』경고에 신민당과 민추협은 오히려 서명 착수시기를 당초 예정(20일)보다 앞당겨 12일 총선 1주년 기념식장에서 전격 행동화하는 역습을 단행함으로써 정국은 일촉즉발의 짙은 전운에 휩싸였다.
의법 처리를 선언해 놓고 있는 사직당국이 이번 신민당과 민추협의 서명행위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인가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긴 하나 현재의 대치상태로 미뤄 볼 때 본격 접전은 시간 문제인 듯한 느낌이다.
여 측으로선 수 차례에 걸쳐 강경 대응을 외쳐 온 데다『개헌서명엔 사법적 대응으로』라는 공식을 재확인하고 있어 요지부동의 입장이다.
신민 당 역시 12일의 기습서명 단행과 함께『전 당원 투옥각오』을 다짐하고 20일 중앙상무 위를 비롯, 지구당개편대회. 개헌 추진본부시도지부 결성대회를 통해 개헌서명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체적인 일정을 마련해 놓고 있다.
신민당은 정부측의 사법대응에 대해서는 오히려 잡혀 들어간다는 작전으로 나오고 있다.
여 측이 강경 처방으로 나오는데는 앞으로의 험 난 국면에 대비,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리고 만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거듭된 의법 처단 경고는 그 동안 전반적으로 외압 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개헌서명운동에 제동을 거는 실질 효과에 큰 기여를 했고 앞으로도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전망도 하고 있는 것 같다.
신민당의 경우 지난해 고대 앞 사건 이후 연속적인 수난 속에 수세의 입장에 몰려 더 이상 물러날 자리도 없게 됐다.
「굴복」이냐,「대항」이냐의 갈림길에서 개헌서명운동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두고 투쟁으로 나설 수밖에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지 않느냐는 설명이다.
재야와 운동권학생들로부터 느끼는 압력 또한 신민당으로 하여금 장외로 내모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강력한 장외투쟁은 내부 잡음을 줄여 당을 단합케 하며 소속의원들의 사기도 올릴 수 있다는 부수 소득도 계산에 넣고 있다.
이 같은 대치국면이 풀릴 기미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야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헌법문제를 놓고 양쪽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민정당 측은 이 문제를 논의할 생각도 없고 입장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13일로 예정됐던 여-야 총무회담도 무산됐다. 총무회담이 열려 봐야 의견접근을 볼 수 있는 아무런 바탕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격돌은 민정당 대 신민당이 아니라 사직당국과 신민당의 대결이란 양상이다.
다만 파국은 피해야 한다는 양측의 공통인식이 아직도 존재하고 여당 측으로서도▲일련의 법률적 제재지침이 안고 있는 논리비약. 일관성 결여라는 비판 ▲대학생 1백89명 구속 등 공권력에 의한 강경 대응이 국민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강공책이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강자논리의 함정 등 이 협상의 길을 모색하게 될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야 측도▲극한 장외투쟁을 대하는 국민들의 불안한 시선▲대안 없는 투쟁에 대한 자체 내 반발 등 대화촉진의 잠재적 요인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야가 안고 있는 이런 대화재개의 요인들도 적절한 계기가 없고서는 전면에 부상할 수 없는 형편이며, 그 계기란 것이 격돌을 한번 겪은 후에야 올 가능성이 점점 우려되는 상황이다.
12일 상오의 서명이 있은 후 정부당국의 사법조치는 착착 진행돼 신민 당사와 민추협사무실이 경찰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고 13일에는 압수수색영장이 신청됐다. 더 이상 정치가 개입될 여지는 없어지는 방향으로 국면이 진행되고 있는 셈.
이날 외부에 있던 이민우 총재는 홍사덕 대변인으로부터 출입통제보고를 받고 하오 2시50뿐쯤 당사에 도착했으나 경찰의 막무가내 식 제지로 한때 경찰과 총재비서. 당원들간의 밀고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한 경찰간부의 지시로 가까스로 당사에 들어섰다.
이 총재는『나를 끌어가려면 끌어가든지 하지 왜 이 야단들이냐』며『영장을 발부 받았으면 수색을 하든지 하지 신민당만 있는 건물도 아닌데 다른 입주 자들에게 불편까지 끼치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호통.
이어 이 총재는 경찰과 실랑이 끝에 들어온 유제연 사무총장, 박찬종 인권옹호위원장, 홍 대변인, 장기욱 의원 등과 잠시 구수 대책회의.
이 자리에서 박 위원장은『수색조가 들어올 경우 사전에 설득해 보는 방법과 사후압수처분취소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는 방법이 있다』면서『서명한 원본을 순순히 내주고 말자』고 제의.
그러나 장 의원 등은『압수수색영장은 범법행위의 증거물일 경우에만 발부되는데 범법행위를 한 적이 있느냐』면서『저항은 하지 안돼 순순히 응할 이유는 없다』고 반론.
이 총재의 당사집결지시를 받고 하오 5시쯤 이기택 부총재. 김동영 총무 등을 비롯, 박종률·안동선·명화섭 의원 등 이 도착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당사 진입에 실패.
이들은 인의 빌딩지하에 있는 다방에 일반당직자 30여명과 함께 집결, 당사의 이 총재와 연락을 취하며 사후대책을 논의. <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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