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장군의 발길을 따라(7)이용범교수<동국대·동양사> 역사기행|회교금욕생활이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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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다음날(l2윌20일) 아침 일찍 나는 이재창·정명호교수와함께 어제의 그 지프를 다시빌어 숙소를 출발했다. 달코트까지는 2백㎞. 그것도 험준한 산길일뿐더러 외국인에대한 통행도 제한돼있어 그 고개까지 답사하기는 난망하지만 갈수있는 지점까지라도 가보고 싶어 다시 그 길로 떠났다.
쓸쓸하고 피곤한 길을 약2시간가량 달려서 위치를 알아보니 기르기트로부터 80㎞도 채 못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르기트의 강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내가 강폭에 주의를 기울였던것은 고선지장군의 달코트 작전이 생각나서였다. 당시 전투에서 고장군은 사이하(기르기트강)에 걸려 있던 「등교」를 끊음으로써 토번(티베트)에서의 증원군을 막았던것으로 『구당서』 「고선지부」엔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하등교는 소발율국에서 토번국의 군사작전을 돕기 위해 1년만에 완공한 다리로 길이가 「일전도」즉 2리나 됐다는데 그 놓아졌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삼엄한 경비태세|외국인 통행제한>
『당서』에는 왕성에서 「동으로 60리지점」으로 돼있는데 그렇다면 기르기트시에서 동남의 칠라스로가는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어느지점으로 보는것이 당연하나 중국 사서에는 그 방향이나 리수가 잘못 적혀있는 예가 가끔 있기때문에 기르기트강의 물줄기를 유심히 살피면서 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강폭은 더욱 좁아지고 이제 앞으로 더 나가봐도 이렇다할 견문을 넓힐만 할것같지도 않을뿐더러 기르기트 주변의 삼엄한 경비태세와 철저한 군의 검문으로 언제 어디서 통행이 저지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일단 차머리를 돌리기로 했다. 등교자리는 딴데서 찾아야 했다.
돌아오는길에 어제 너무 늦어서 충분히 관찰하지 못했던 마애석불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2시간만에 우리는 다시 마애석불앞에 섰다. 낮에 보는 그 장엄한 모습에서 나는 다시 이곳을 찾은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여기서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났다.
운전기사가 차머리를 돌리다가 모래토질의 구렁이속에 뒷바퀴를 빠뜨린 것이다.
아무리 수를 써도 차는 꿈쩍도 안했다. 난처한 표정으로 어찌할바를 모르던 우리는 갑자기 산속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어떤 청년 한명이 나타나 유심히 우리를 지켜보더니 아무말도 없이 사라졌다. 이야기거리는 이 청년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일어났다.
전혀 길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던 산골의 여기저기서 늙은이·어린이·장정할것없이 10여명이 달려와 차를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 금방 도로위에 올려놓고는 가벼운 미소와 이상한 손깃을 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뿔뿔이 흩어져 다시 깊은 산속으로 사라지는것이었다. 그들이 차를 끌어내는 동안 소지품에 신경을 썼던것이 헤어질때 보낸 그 부드러운 미소를 보는 순간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이념상의 이해관계로 그 부드러운 미소가 격분의 얼굴로 바뀌어지는 경우엔 어떻게될는지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던 산골짜기에서 순식간에 모였다가 일을 마치면 뿔뿔이 사라지는 그 기동력이야말로 기습작전에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수 있겠기 때문이다.
근대식 무기의 위력만 믿은 나머지 이곳의 지형과 생활방식이 거의 같은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에 섣불리 말려들어간 소련군이 겪고 있는 고전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랐다. 『호랑이가 자기 힘만 믿고 황하를 건너려고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본다(포호빙하)』는 어느 중국 고철의 비유가 이곳에 와서 소련군의 군사적 비극을 생각하며 연상돼졌다.
우리는 더 머물지 않고 오후2시 기르기트를 떠나 다시 칠라스로 향했다.

<두강의 합류 지점등|고<고금 비슷한 상황>
인더스강변의 암석위에 새겨진 선각불화를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어하는 미술사전공학자들의 간절한 소망에 따른 것이다.
기르기트강과 인더스강의 합류점에서 다시 차를 멈췄다.
이곳이야말로 기르기트강 전유역에서 그 강폭이 2이가 되고 토번에서 원군이 오는경우 꼭 통과해야할 길목일뿐아니라 『구당서』 「고선지전」에 보이듯 소발율국의 왕성에서 동으로 60리라는 점에서도 고선지장군이 기르기트 전투를 마무리 짓기위해 「사이하 등교」를 끊었던 지점으로 비정할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지점에서 인더스강을 건너는 다리는 중공이 가설한 시멘트다리다.
그다지도 복잡했던 국제정세를 타개하기 위해 1천2백년전 고선지장군이 혈전을 벌였던 이 지점에 서서 현재 이곳을 거쳐 산허리를 뚫고 남으로 뻗치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바라보면 지금 이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내외적 상황이 어쩌면 1천2백년전 당시의 상황과 그렇게도 흡사한지 놀라지 않을수없다. (시리즈 제1회 참조)
칠라스의 객사에 도착한것은 오후4시를 훨씬 지나서였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조사단원들이 모두 인더스 강변으로 선각불화를 다시 조사하기 위해 떠난뒤 혼자남은 나는 그동안 조사한것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조사 예정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슬라마바드로부터 지금까지 5일간이나 같이 생활해왔던 운전기사로 부터 뜻하지 않은 요구를 받았다.
너무 피곤하니 술 한잔만 달라는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너무도 엄청난 청이었기에 귀가 의심스러워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그는 말했다.
『외국사람들이 갖고 들어와 주셔서 우리같이 신경을 많이쓰는 중노동자들은 약으로 삼아 자주 마시지요.』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만난 주한파키스탄대사가 여행할때 꼭 지켜주어야 할 주의사항으로 술만은 절대로 삼가달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기에 술은 한방울도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 어리석게도 여겨지게 됐다.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운전기사는 실망과 당황이 섞인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으나 이 조그마한, 그리고 순간적인 사건을 통해 파키스탄만이 아니라 크게는 회교문화권의 장래에 관해 무엇인가 생각해보아야할 숙제를 던져주는것 같았다.

<엄격한 이슬람계율|여행객이 오염시켜>
이슬람사회에선 엄격한 계율에 따라 남녀의 부정행위·음주·돼지고기식용이 금지되고 있는 이른바 「삼무」의 나라인것은 상식으로 돼있다. 이 나라에서도 음주와 돼지고기식용등이 철저히 금지되고 있음은 카라치· 라호르같은 국제도시에서 이미 겪은 바다.
시간을 다투는 무리한 여행일정에서 오는 피곤과 지방분이 많은 식사가 역겨워 카라치에서는 한국음식점 「진고개」와 중국요리집에서, 그리고 라호르에서는 대표적인 관광호텔음식점에서 『혹시 무거운 음료는…』하고 살짝 물어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든가『그런것은 이나라 어디에도…』라는 퉁명스런 대답에 쑥스러웠던 일이 가끔 있었다.
이런나라에서, 난데없이 서북변두리의 가장 구석진 이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숙소에서 술이 거론됐다는것은 심상치않은 일이었다.
우선 해외여행을 할때는 그 나라의 문화전통과 규범을 존중하고 지켜주는것이 예의임에도 이곳 여행객들이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며 전통적인 생활규범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쏟고있는 순진한 이곳사람의 생활질서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고속도로가 깔린뒤 잠잠한 그 겉보기와는 달리 빠른속도로 바뀌어가고있는 카라코룸 산속의 현실을 외면한데서 온것인지도 모른다.
교통로가 개설된곳 치고 그 고유의 생활양식이나 생활규범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 예가 없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교통망이 지니고 있는 이 같은 마력은 이미 하이웨이가 깔린 카라코룸의 깊은 산골짝 주민이라해서 옛과 다름없는 생활양식과 의식구조, 그리고 인종간의 순수성을 건드리지않고 스쳐지나가기만 하지는 않을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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