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내 외국인 납치·석방교섭 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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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0여개의 복잡다단한 파벌에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발족하는 레바논 종파단체들과의 협상을 벌이는데는 대화창구의 마련, 요구 조건의 절충및 인질의 안전한 인도등 그시작에서 끝까지 난항의 연속이지만 지금까지 인질석방을 성공시킨 예도 많다.
베이루트의 서부지역이 회교도들에 의해 장악되면서 외국인 납치사건이 빈발하기 시작한 임년이후 납치된 40명중 22명이 현재까지 풀려나 50%이상의석방률을 보이고있는 셈이다.
남치범들이 인질을 풀어준경우는 대체로 △요구 조건이 관철되었을 때△납치 단체가 반대 파벌에 의해 괴멸되었을 때△범행 목적이 변경되었을 때△배후세력에 의해 강력한 종용을 받았을 때 등이었으며 때로는 뚜렷한이유없이 인질이 풀려나온경우도 종종 있다.
납치인질의 석방댓가로 막대한 금액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대개 레바논인을 상대로한 경우로 외국인이나 외교관을 상대로하는 경우는 드물다.
▲베이루트주재 소련대사관의 「스피린」문화담당참사관·「카트코프」영사등 4명은85년9월30일 소련대사관 앞길에서 승용차를 타고가다 총부리를 겨누는 무장괴한에납치되었다. 사건직후 회교해방기구 (ILO)가 납치된 소연인들의 사진을 보내왔다.
ILO의 요구조건은 레바논북부 트리폴리에서 벌어지고있는 친소적인 시리아지원의 공산게릴라 침공을 중지시키라는 정치적인 내용. 납치범들은 요구조건을 제시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뜻을 강력히 나타내기 위해 「카트코프」영사를 살해, 그의 시체가 사건발생 2일만에 베이루트 운동장부근 주차장 공터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에따라 소련측은 시리아측에 종용해 시리아의 한고위관리가 납치사건 2일뒤 레바논내 회교종파 지도자들과 접촉, 트리폴리에서 전투를종식시킴으로써 납치범들의요구를 들어주었다. 인질3명은 그뒤 보름만인 10월30일석방되었다.
▲트리몰리주재 프랑스문화원의 「페이롤레」 원장은 85년 3월23일 「레바논 무장혁명단원」이란 단체의 게릴라들에 납치되었다가 10일만에풀러났다. 반이스라엘성격의이단체는석방조건으로 프랑스주재 이스라엘대사관 직원을 살해한 혐의로 프랑스에 억류중인 동료 1명을 석방할것을 프랑스측에 요구했다.
그러던중 회교 시아파 아말민범대와의 전투에서 패배, 투항하면서 인질을 억류할수없는 처지에 놓이자 「페이롤레」씨를 풀어주었다.
▲미국인 「와이어」목사(61)피랍사건은 특수한 경우. 중동지역에서 30여년간 선교활동을 해온「와이어」목사는 84년5월8일 부인과 함께 베이루트 거리를 걷다가 도서기관 납치가능단체중 하나로거론됐던 「헤즈볼라」 (신의당)운동 단원들에 의해 강제로 승용차에 실러 납치됐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프랑스등 서방대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러다 수감중인 헤즈볼라단원의 석방을 조건으로 다른 미국인 6명과 함께 납치되었으나 「레이건」 대통령에게 성명서를 전달하라는 조건으로 16개월만에 풀려나왔다. 성명서내용은 쿠웨이트에억류중인 헤즈볼라단원을 석방치 않으면 나머지 미국인인질을 살해하겠다는 것.
「레이건」 대통령은 「와이어」씨로부터 이성명서를 전달받았으나 납치범들의 요구를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석방 사례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에서의 납치사건은 크고 작은 무수한 종파간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고 협상창구가 불투명한 점등 때문에 석방교섭의 정형을 찾기가 힘들다.<제정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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