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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실망하는 것보다 더 한심해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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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호 32면

저자: 백영옥 출판사: 아르테 가격: 1만6000원

이제는 가사를 외우는 노래가 몇 곡 되지 않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노랫말과 멜로디들이 있다. 특히 어릴적 TV 애니메이션 주제가들은 지금도 앞 소절만 던져 주면 줄줄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빨강머리 앤’은 그중에서도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이 주옥같은 노랫말은 전 세계의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럽다고 믿는’ 소녀들에게 큰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빨간머리 앤’은 우리 모두의 친구였다. 앤이 깨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캐시 모리스라는 이름을 붙여 가상 친구를 만들었던 것처럼, 나도 나와 가장 닮은 상상의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뿐이랴. 나도 초록지붕 집 다락방에 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길 희망했고, “크고 굉장한 생각은 그에 걸맞게 크고 굉장한 말들로 표현해주어야 해요!”라는 말을 신봉했다. 지금도 툭툭 튀어나오는 부사와 형용사의 향연은 모두 앤이 남긴 흔적일런지도 모른다.


소설가 백영옥 역시 앤에게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고백한다. 사표를 집어던지고 싶을 때, 삶이 영 팍팍하게만 느껴질 때, 그녀는 에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50부작을 보고 또 봤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앤이 한 말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고, 듣기만 했을 때와 들은 말을 적었을 때의 차이만큼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는 앤의 조언에 따라 ‘다시’ 소설을 쓰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그해 가을, 그는 정말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쓴 소설이 운 좋게 당선됐다”는 수상소감을 가장 싫어했다는 저자는 10년 넘게 신춘문예에 낙방한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누군가의 성공담에는 교훈이 있지만 위안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이기에 누군가 위로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실패담을 흔쾌히 꺼내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빨강머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경우 아빠가 대학에만 가면 코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부터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겼고, 그 때문에 코를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으며, 그러다 본 손톱이 성가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우리도 언젠가 길버트가 앤을 홍당무라고 놀린 것처럼 무심코 누군가의 ‘빨강머리’를 잉태시켰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느새 등단한 지 10년차가 된 소설가로서의 소회도 밝힌다. “어차피 사는 건 상처를, 굴욕을, 멀어지는 꿈을 감당해내는 일”이니 “살면서 어떤 종류의 고통을 참을 것인가”만 결정하면 된다고 말이다. “글이란 건 어쩌면 맛없는 건강식을 먹듯 꾸역꾸역 메우며 쓰는 것”이라는 고백이나 “나는 이제 홈런을 치겠다는 야망보다는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연습을 거르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다짐은 제법 신선하다. 영원히 『스타일』속 주인공처럼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신고 뛰어다닐 것 같던 그녀가 삼선 슬리퍼를 신고 꾸역꾸역 쓰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니, 묘하게 위로가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앤이 ‘기쁨의 하얀 길’을 거닐던 그 때로 한 번 돌아가 보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단순한 진리가 의외의 깨달음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기운이 날 것 같지도 않고, 기운 나게 하고 싶지도 않다면, 그저 슬픈 채로 있는 것이 슬픔을 분노로 바꾸는 것보다 훨씬 낫다. 매일 하는 새로운 실수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믿는 자에게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 일어나는 법이니.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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