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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금요일] 힘 꺾인 ‘케말리즘’…터키, 이슬람주의 국가로 회귀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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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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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후 10시29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터키 보스포루스 대교 위에 탱크가 등장했다. 보스포루스 해협 위를 저공비행하는 공군 전투기도 목격됐다. 1997년 이후 19년 만에 발생한 터키 군부 쿠데타의 신호탄이었다.

‘국부’ 케말, 오스만제국 패망 뒤
1923년 세속주의 국가로 개혁
정치·종교 분리하며 술탄제 폐지
비무슬림 차별 금지, 여성에 참정권
정치권력 이슬람주의 회귀 때마다
군부, 세속주의 수호 내걸고 쿠데타
“에르도안 폭주 막을 기회 놓쳤다”
79년 ‘이란 혁명’ 재현 가능성 고조

하지만 불과 6시간 만에 상황은 바뀌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다음 날 오전 4시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CNN튀르크 방송을 통해 애플 아이폰의 화상통화 앱인 페이스타임으로 자신의 건재를 알리면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거리로 나서라”고 말했다. 지지 기반인 각 지역 이맘(이슬람 성직자)을 통해 “거리로 나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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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 [AP=뉴시스]

이번 쿠데타를 무산시킨 건 시민이었다. 2002년 집권 이후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온 ‘철권 통치자’ 에르도안도, 15일 밤 방송국을 장악했던 쿠데타 세력도 민주주의를 앞세웠지만 시민들은 에르도안의 손을 들어줬다.

‘스마트폰 시대에 20세기식 쿠데타는 설 자리가 없었다’(워싱턴포스트), ‘쿠데타가 성공할 정치적·경제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뉴욕타임스) 등의 분석이 나왔지만 터키의 현 상황은 더 복잡하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수년 동안 세속주의파와 이슬람주의파 간의 전투가 터키의 심장부에서 벌어져 왔다”며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 이후 최대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쿠데타를 단순히 독재 대 반독재, 민주세력 대 반민주세력의 대결로 보기 어려운 건 터키공화국 수립 이후 이어져 온 오랜 갈등 때문이다. 세속주의파와 이슬람주의파 모두 민주주의를 앞세우지만 그 내부엔 튀르크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의 발호 등 복잡한 갈등 요소가 얽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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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군을 폭행하는 에르도안 지지자들. [AP=뉴시스]

터키 군부는 오랫동안 ‘세속주의의 수호자(Guardian of Secularism)’를 자처해 왔다. 이번 쿠데타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터키에서 세속주의의 다른 이름은 ‘케말리즘’이다. 터키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이름에서 따왔다.

케말은 현대 터키의 정치체제를 설계한 인물이다. 유라시아 대륙과 유럽,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건설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케말이 태어났던 19세기 말 이미 ‘병든 거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에서 25만 명의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패퇴시킨 케말은 튀르크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패전했고 전후 로잔조약으로 영토 대부분을 빼앗긴 뒤 건국 70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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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투르크 제국 전성기를 이끌었던 술탄 슐레이만 대제(왼쪽).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오른쪽).

케말은 터키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꾀했다. 이슬람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이 서구 민주체제를 바탕으로 한 세속주의 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이른바 ‘여섯 개의 화살’로 불리는 체제변혁은 케말리즘의 핵심이자 현대 터키공화국의 기본 체제가 돼 왔다. 이슬람 ‘칼리프 국가’는 술탄이 최고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를 겸한 정교(政敎)일치 체제이지만 케말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칼리프제를 유지하되 정치적 지배자인 술탄제는 폐지했다. 서구적 공화정 체제를 이슬람 국가에 접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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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 민족주의도 앞세웠다. 오스만 제국에 팽배해 있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선 전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종교보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와 민족문화를 강조했다. 터키 내 그리스계 주민과 그리스 내 터키계 주민을 맞교환하기도 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화살로 불리는 정책이 이른바 ‘세속주의 국가’ 건설이다. 헌법상 국교 조항을 없애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 차별을 금지했으며 여성의 권리와 의무를 인정하고 참정권도 부여했다. 1928년에는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 알파벳을 도입했고, 이슬람 공휴일인 금요일 대신 일요일을 공휴일로 삼았다. 1934년 케말은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다. 성(姓)을 쓰지 않는 이슬람식 명명법 대신 전 국민에게 성을 만들어 쓰게 하면서 자신은 스스로 ‘아타튀르크’를 성으로 삼았다.

터키는 공화정 수립 이후 네 차례의 쿠데타를 겪었다. 모두 이슬람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발이었다. 50년 처음으로 다당제를 허용한 뒤 집권한 민주당이 종교교육 의무화 등 이슬람주의 정책을 펼치자 60년 첫 쿠데타가 발생했다. 케말 아타튀르크가 천명한 6개 원칙, 그중에서도 세속주의 정치체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수호자’로서 군의 역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군부는 민정에 정권을 이양한 뒤 병영으로 돌아갔다. 71년·80년·97년의 쿠데타도 공화국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터키 군부가 ‘세속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건 이런 역사적 배경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2002년 에르도안 집권 이후 변화의 물결을 맞았다. 유럽과 아시아의 가교(架橋)이자 서구와 이슬람의 연결 고리라는 터키의 지정학적 특성에 에르도안의 민족주의 포퓰리즘이 더해지면서 케말 아타튀르크의 ‘6개의 화살’은 균열을 맞았다.

케말의 세속주의 전통 역시 반대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서구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선출된 권력이지만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에르도안 정권도 마찬가지다. 결국 21세기 들어 뚜렷해지고 있는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의 부상이 터키의 정치 지형을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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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1세기 ‘술탄’을 꿈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7일 쿠데타 희생자 추모식장에서 묵념하는 에르도안 대통령. [AP=뉴시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집권 이후 수차례 ‘쿠데타 음모’를 적발하면서 군부 내 ‘케말리즘’ 세력을 숙청해 왔다. 반정부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고 언론을 손아귀에 넣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을 제한하는 등 표현의 자유도 억압했다.

세속주의 전통을 부정하고 이슬람주의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에르도안 정부가 쿠데타 세력이라는 분석도 있다. 터키 전문가 앤드루 핀켈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터키는 이미 ‘슬로모션 쿠데타’를 겪고 있다”며 “쿠데타의 주체는 군부가 아니라 에르도안”이라고 주장했다. 핀켈은 “이번 쿠데타 실패는 에르도안 정부의 폭주를 막을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세속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해온 터키 군부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이번 쿠데타 실패는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이라크·시리아와 접경한 유럽의 관문인 터키가 어떤 정치적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세계의 목줄을 죄게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터키엔 3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들어와 있고 유럽연합(EU)은 터키와 난민송환협정을 통해 유럽으로의 난민 유입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군사적으로도 터키는 나토와 미국에 중요한 동맹국이다. 미국은 54년 터키와 협정을 체결해 인서리크 공군기지를 공동 사용하고 있다. 나토 핵무기 공유 협정에 따라 90기의 핵무기가 배치돼 있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의 대테러 전쟁에 있어서도 터키는 서방 군사작전의 최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에선 에르도안 대통령이 오스만 제국 술탄처럼 정치권력(술탄)과 종교권력(칼리프)을 모두 차지하려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이는 정교분리를 주창한 케말리즘과 터키공화국의 건국이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교일치의 칼리프 국가는 IS가 내세우는 체제이며, 터키 군중들이 쿠데타군 병사들을 길거리에서 폭행하고 동영상을 찍는 모습 역시 IS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터키 전문가인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 소네르 차갑타이 선임연구원은 “터키는 79년 이란과 같은 ‘이슬람 혁명’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이라며 “서구의 반발과 경제 타격을 감안해 에르도안 정권이 권력을 공고히 한 뒤 점진적인 이슬람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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