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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경쟁력 위해 ‘한국형 모델’ 수립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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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말이 있다. 높은 곳에 사다리를 타고 먼저 올라간 사람이 뒷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는 뜻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위선적인 행태를 꼬집은 바 있다.

김재수│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

선진국들이 자국의 경제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에는 보호관세와 높은 정부 보조금으로 자국 산업을 발전시켜 놓고, 후발주자인 개발도상국들에게는 보호무역과 관세를 철폐하고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라고 하고 있다. 특허권이나 상표권 등 지적재산권 분야도 비슷하다. 세계 경제와 무역, 금융 분야에서 선진국 중심의 국제무역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이러한 선진국의 ‘제 논에 물대기’ 식 정책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어 “도로 보호주의”로 회귀한다고 할 정도이다.

농산물 교역 분야도 마찬가지다. 오랫 동안 막대한 농업보조금과 지원으로 튼튼한 농업 기반을 확보한 농업 수출 선진국들이 이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통해 농업보조금 철폐를 주장한다. 미국은 자국 농업 보호를 위해 최저가격보장, 고정직접지불제, 경기대응 소득보조 등 ‘3중 농가소득 안전망’이라 불리는 농업보조금을 지원해 왔다. 농업보조금이 미국 농업소득 총액의 4분의 1에 달할 정도다. 유럽연합(EU) 역시 농업과 어업 보조금이 EU 예산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보조금을 통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의 농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었다.

작년 연말 열린 ‘제10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농업 분야 수출보조금에 대해 선진국은 즉시 철폐를 하고 개발도상국은 2018년 말까지 철폐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도 2023년까지는 수출물류비 보조를 철폐해야 한다. 330억원에 달하는 수출물류비 보조가 중단되면 영세 수출구조인 우리 농업은 큰 부담을 안게 돼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전통적 경제이론과 정책이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국부론’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한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시장경제이론과 무역자유화는 많은 성과를 냈으나 양극화 심화, 소득 불평등, 성장의욕 저하 등 부작용도 많다. 농업이나 농산물 교역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 테네시대학의 대릴 레이 교수는 “농산물 시장은 수급 변화에 따른 가격 변동이 신축적이지 않다. 시장경제 일변도 정책은 농가소득을 붕괴시키고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킨다”면서 시장경제 만능주의를 경계했다. 선진국도 무역자유화를 통한 시장개방만이 살길이라는 일방적 주장에서 벗어나고 있다. 201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G20 농업장관회의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농산물은 인간의 먹거리를 다루는 산업이므로 공산품처럼 교역을 자유화하거나 시장에 전적으로 맡겨 둬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개방과 보호를 두고 우리 농업 분야는 치열한 논쟁을 거쳤고, 세계적 추세인 시장 개방을 선택했다. 지난 30년간 의 본격적 개방화 시대를 돌아보면 많은 교훈을 얻는다. 우려보다 피해가 크지 않은 부문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피해도 있다. 농식품 수출 증대 등 새로운 희망도 보았다. 농업부문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농업의 미래 발전가능성도 높다. “농업발전 없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어렵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나 “장기 경제정책의 승패 는 농업 분야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는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경제 일변도의 무역자유화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농업이 얻은 교훈은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을 무조건 따라해서는 안된다. 자국 농업 보호를 위해 문을 걸어잠그는 일부 선진국들의 보호무역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이는 신종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위험이 높다. 선진국 모델을 참고하되 우리 실정에 알맞은 ‘한국형 모델’을 수립해야 더 이상의 ‘사다리 걷어차기’에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김재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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