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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성역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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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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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가 연임을 노리며 내세웠던 선거 공약에 따라 지난달 23일 유럽연합(EU) 관련 국민투표가 영국에서 치러졌고, 그 결과 득표율 51.9%로 ‘떠난다’는 쪽이 승리했다. 영국은 이제 테리사 메이 신임 총리의 지휘 아래 EU를 떠날 채비를 하게 됐다. 탈퇴를 위한 EU와의 협상에는 또다시 두 해가 소요될 수 있다.

단 한 번의 국민투표로
이전 세대가 이룩한 진보를
파괴하는 어리석은 일 없도록
최대한 절차 엄격하게 해야

이로써 EU는 유럽의 3대 경제 대국 중 하나, 세계 최고의 금융 강국 중 하나, 유럽 내 미국의 최고 외교 파트너,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유의미한 수준의 국방예산 보유국을 잃게 됐다. 아울러 영국은 분리독립주의 색채가 강하고 유럽 친화적인 스코틀랜드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독립 여부를 묻는 두 번째 주민투표를 목도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영국의 이번 국민투표는 유럽의 경제·사회·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서양사의 주요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轉機)가 되고 있다. 앞으로 상황에 따라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우리가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특정 제도나 경제·사회·과학의 발전을 진보로 간주해 왔다. 그리고 한번 진보로 인정되면 굳이 재론할 여지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그 수단이 아무리 민주적인 투표라 해도 그렇다. 그러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이후로 암묵적이지만 본질적이었던 이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캐머런 전 총리가 먼저 이 문제를 던짐으로써 EU 내 다른 국가들에도 같은 질문을 제기할 권리, 즉 아버지 세대가 만든 것을 자식 세대가 해체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벌써 브렉시트의 사례를 따르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로 우리는 더 이상 유럽의 프로젝트가 비록 저마다 속도는 달라도 오직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아울러 이제 유럽은 자멸하고자 하는 의지까지도 책임지게 됐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더 넓게 보면 이번 국민투표는 한 나라의 국민이 지금까지 불가역적인 것으로 간주해 왔던 제도 개혁, 사회적 쟁취, 관습 개혁 같은 모든 진전을 그 기반부터 다시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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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것은 국민의 뜻에 달려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서 원칙적으로 항상 인정해 온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서양의 법 견해에 따른 민주주의, 종교의 자유, 아동 노동 금지, 사형제 폐지처럼 그저 투표 한 번으로 무너뜨릴 수 없고 되돌려서는 안 될 진보의 역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미 합의가 이뤄진 이 같은 사실을 재론하는 것은 결국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일부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급기야 지식의 축적이라는 개념까지도 재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수세기 전부터 과학은 새로운 이론들의 발판 위에 진전을 이룩해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론들은 기존의 개념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었다. 과학은 다윈을 능가할 수 있다. 즉 다윈을 부정하지 않고도 생물진화론이라는 그의 관점을 훨씬 더 넓은 이해의 틀 속에서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의 역사가 이성의 영역 밖에서, 그것도 정치적인 결정으로 부정된다면 과연 지식이 축적될 수 있겠는가.

진보의 이름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고 나면 이성과 자유가 신앙과 운명론에 의해 짓밟혔던 시대로 역행하고, 민주주의라는 무기로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 한 번의 국민투표로 어떤 일이든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늦기 전에 차분히 숙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헌법에 수록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성역화가 필요한 사안의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후대에 파급될 영향력이 큰 사안의 조정에 대해서는 국민투표에 회부하기 전 최소 두 차례의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어 단 한 번의 국민투표가 장기적으로 원치 않았던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헌법 개정 절차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다음 세대의 운명에 막중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은 최소 1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표명된 국민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고, 찬성 비율이 전체 투표자의 60% 미만이면 채택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국민의 열망은 무시한 채 낡은 질서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절망적 시도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국민에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주고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 남겨 주고 싶어 한 진보의 역사를 특정 세대가 일시적인 기분으로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장치가 있었더라면 많은 경우 유럽이 야만 속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절차가 구원자로서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플래닛 파이낸스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