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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풍신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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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임진왜란(1592∼1598년)은 한국 민족의 최고 영웅 이순신과 일본인의 최고 영웅 풍신수길이 대결한 전쟁이었다. 아니, 이 전쟁은 한일 양 국민이 자기들의 민족적 영웅을 앞세우고 그들 고유의 저력을 최대한으로 기울여 싸운 총력전이었다. 우리는 이 전쟁 초반에 곤욕을 치렀지만 기어이 침략군을 이겨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수길은 『미천한 출신의 잔나비같이 생긴 모험가』(a base-born monkey-faced adventurer J·murdoch,『일본사』)였다. 그는 하극상 현상이 심했던 「전국시대」에 성도 없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순전히 개인적인 재능과 노력으로써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권세를 누리는 지위(대합)에 까지 올랐다.
이 점에서 그는 중국의 한고조(유방)나 명태조(주원장) 와 견줄만하다.
또 그는 1백여년간에 걸쳐 전개되었던 일본의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함과 동시에 중앙집권적 봉건 통치 체제(막번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근대 일본이 장기간 평화를 누리고 부국강병을 도모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중국 역사의 진시황이나 모택동과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길에게는 볼만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에는 하자가 있었다. 초년 고생이 심한데다 학문적 소양이 전혀 없었던 수길인지라 그에게는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 등의 병적 증세가 심했던 것 같다. 그는 일본열도의 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중국·인도 및 필리핀 등 동아시아 전부를 정복하려는 터무니없는 야심-「알렉산더 콤플렉스」(Alexander Complex)을 부려 한반도에서 무모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그는 「참패」(G·Sansom, 『일본사』)했을 뿐 아니라 무고한 인명을 수없이 살상하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는 또 사소한 감정적 이유로 자기의 다도 스승(천리휴)을 자살에 몰아 넣었고, 만년에 얻은 외아들(수뢰)을 익애한 나머지 이미 양자·후계자로 지명해 두었던 그의 생질(수차)을 제거하며, 그 친족과 하인 및 이들에 대한 동정자들을 모두 잔인한 방법으로 몰살함으로써 인격 파산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수길은 일본의 「전국시대」가 나은 전형적인 업적 지상주의 인간으로서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의 영웅(?)이었다.
이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차원이 훨씬 높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 2백년의 평화와 엄격한 신분제도, 그리고 난숙한 유교 문화를 배경으로 서울의 양반 가문에 태어난 그는 33세에야 비로소 무과에 합격할 정도로 만성형의 대기였다. 무관 이순신은 15년간 함경도 삼수 지방의 일선 근무에서 전라도 정읍의 현감까지 주로 육지의 한직에서 전전하였다.
그가 역사적 인물로 데뷔하는 것은 왜란을 1년 앞두고 정부가 그를 전라 좌수사로 특탁한 다음부터다. 그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 제1호를 완성하였고 이어 거듭된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써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하늘과 해를 다시 손보는 공』(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명나라 제독·진린의 평)을 발휘·성취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하마터면 동양의 「세계대전」이 될 뻔했던 전쟁을 국지전으로 축소시켜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냈고 나아가 아시아 전체를 전화로부터 구해 낸 셈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업적은 가히 세계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사가들이 그를 「드·루이터」(De Ruyter)나 「넬슨」(Nelson) 같은 세계 정상급의 맹장과 비견하는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R·Storry, 『근대 일본사』).
이순신 장군은 한낱 무인으로서 빼어난 영걸에 그친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훌륭하였다. 그의 겸손·인내·검소 등 개인적 미덕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이순신 장군은 문무를 겸전한 천재로서 그가 남긴 시문은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한다. 그는 부하 장병과 관할 지역 내의 서민을 친자식같이 사랑한 인간애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천명」을 의식하고 이에 순종하는 종교적 자세로써 생을 일관하였다.
순사 전날 밤에도 그는 갑판 위에 올라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늘에 축원을 올렸다 하지 않는가! 과연 이순신은 지장·용장·덕장이란 칭호로 부르기에는 아까운 「성웅」이었다.
과거 1백여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는 일본의 「전국시대」 같이 전란이 잦고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격동(하극상)이 심한 일종의 「난세」였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는 풍신수길형의 「벼락 출세자」가 양산되었다. 따라서 수길식의 생활 철학과 행동 양식을 본받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른바 정치가·사업가·교육가라고 불리는 우리의 지도자 중에는 과대망상의 모험주의, 몰윤리적인 업적 지상주의, 그리고 냉혈의 이기주의로 「출세」한 인격 파산자가 허다하다.
그들은 한때 부귀영화를 누리는 듯하나-마치 수길의 경우와 같이-그 권·부를 1대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일생도 「허무」하게 끝맺는 것을 본다.
수길식의 확대 주의·업적 지상 주의는 비단 개인의 생활 스타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 입안과 그 추진 방법에도 작용하는 철학인 듯하다.
우리는 소위 「조국 근대화」를 밀고 가는 과정에서 무리한 야심을 부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또 근대화의 목적과 수단을 선택함에 있어 지나치게 인간을 도외시하지 않았는가? 그 결과 우리 사회는 현재 인격 파산자처럼 균형과 조화가 깨진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가? 만약 이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우리는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어쩌면 이순신의 모델이 우리의 활로가 아닐까? 이순신은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업적은 군사적·정치적이기에 앞서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는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 겸손·인내·사랑 등 유한 수단을 택하였다. 그의 출세는 더디었지만 그는 결국 누구보다 위대한 일을 해냈다. 이순신의 길은 수길의 길보다 좁고 험하고 더디다. 그러나 이 길이 가장 한국인다운 길이요, 우리 민족이 진정으로 「극일」하며 「근대화」 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영익 <한림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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