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5)동경오륜의 농구예선-제84화 올림픽반세기(4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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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경올림픽의 전초전은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농구 예선대회였다. 10개국중 4개팀이 본선 진출권을 따게 되므로 한국팀으로서는 필사적이었고 재일동파의 응원도 열광적이었다.
당시 라디오 중계방송을 통해 전국의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던 「문현장사건」도 이 예선대회때의 일이다. 3승2패로 본선진출의 고비에 선 한국팀은 멕시코를 맞아 후반10분쯤까지 14점을 앞서며 게임을 주도했다. 그러나 타임 업 5분을 남기고 팀의 대들보 김영기와 김영일이 동시에 5반칙으로 퇴장, 멕시코의 추격을 허용했다.
타임업 6초를 남기고 우리팀이 75-74로 리드한 상황에서 문현장은 자유투 2개를 모두 실패했고, 멕시코는 타임 업 버저 소리와 함께 1골을 성공시켜 승패를 갈랐다. 이날 중계방송을 듣던 국민들은 『경기엔 이기고 기록에 졌다』며 땅을 쳤다. 문선수의 집에는 돌까지 날아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팀은 예선대회 전적 5승4패로 겨우 본선 턱걸이했지만 세계의 벽을 뚫지 못하고 9전 전패로 꼴찌를 차지했다. 그러나 노장 김영기는 예선대회 개인득점 1백97점으로 랭킹 2위를 마크, 「농구의 천재」로서 빛을 발했다.
농구·배구의 연패와 함께 한국선수단은 대회 초반부터 고전의 연속이었다. 다만 복싱·레슬링·유도등 투기종목에서만 승전보가 날아왔다.
레슬링 감독 김극환은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했다. 아마레슬링협회 회장이기도한 김극환은 강화훈련 당시부터 선수들을 진두지휘했고 직접 감독을 맡아 결전장에 나갔다.
김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은 물론 식사관리. 규율에 이르기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는 호랑이 였다. 김감독은 출국전 장창선(자유형 플라이급)에겐 메달을 기대하고 다른 선수 2명정도가 입선권에 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김감독의 장담처럼 장창선의 승승장구, 은메달을 확보하고 결승에서 일본의 「요시다」와 맞붙었다. 「요시다」는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62년)와 동경국제스포츠대회(63)에서 장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줬던 숙적이었다. (자카르타대회에서 「요시다」는 금메달, 장은 은메달).
경기가 시작되자 「요시다」는 장의 공격을 피해달아나기만 했다. 성급하게 덤비던 장은 너무 공세만을 취하다 허점을 노출, 불의의 반격을 당해 1점을 잃고 말았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장은 결국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장의 메달은 우리 선수단의 첫 메달, 런던대회 이후 줄곧 올림픽에 도전해온 레슬링의 첫 경사였다.
장의 쾌거는 전파를 타고 날아와 온 국민을 흥분시켰고 그의 장한 어머니 김복순씨는 또 다른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인천의 시장 한귀퉁이에서 콩나물을 팔아 온 김씨의 정성어린 뒷바라지가 없었더라면 은메달의 영광도 바랄 수 없을 일이었다.
동경올림픽 2년후 장은 미국톨리도에서 열린 세계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대회를 제패, 세계정상에 오르는 감격을 안았다.
그후 선수에서 은퇴한 장은 사업에 투신,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현재의 유창상사와 협진산업등 2개의 기업체를 이끄는 사업가로 자랐다.
또 한편으로는 아마레슬링협회의 전무를 맡아 후배들을 육성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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