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도『사람』보다『조건』이 맞아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남편과 아내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가정은 한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 이 부부·가정상이 요즘 어쩔수 없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다. 모두가 더 잘 살게 되었다는 80년대도 후반에 접어든 이즈음 우리의 부부관계는 어떻게 변해오고 있는가. 그 실상을 알아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이름하여『부부상이 바뀌고 있다』.
적령기의 딸을 가진 가정주부 김혜주씨(52·서울은평구갈현동)는『딸의 혼인 생각만 하면 태산이 앞을 막고 있는양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한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딸은 아직 직장도, 마땅한 혼처도 없어 본인 스스로도 은근히 초조해하는 기색이기 때문이다.
수더분한 외모에 모난데가 없는 성격으로 나무랄데 없는 딸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집안인데다 딸 자신이 맞벌이 아내감도 아니어서 이를테면「내세울」결혼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고민하기는 남자쪽도 마찬가지.『얘기가 잘 돼나가다가도 결혼하면 70넘은 노부모를 모셔야한다면 여자들은 곧 얼굴빛이 달라지더군요. 결혼 당사자의 됨됨이 보다는 조건이 앞서더군요.』S기업 총무과에 근무하는 32세의 노총각 한진수씨의 토로다.
요즈음의 결혼, 특히 도시의 중상층 결혼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한 한 인간과 인간끼리의 만남이 아니라 조건과 조건과의 결합이라느데 크게 이의가 없다.
심지어『중매결혼은 서로의 학벌·가정배경·재산·외모·재능을 저울질하며 절대 손해보지 않고 되도록이면 이득을 보려는 상거래와 다름없다』고 작가 윤남경씨는 신랄하게 꼬집는다.
실상 시중에는 결혼 중매등에 얽힌 갖가지 소문들이 범람하고 있다. 판·검사, 외교관의 인기는 60, 70년대만은 못하지만 아직도 일급 신랑감으로 꼽힌다. 의사의 인기는 여전한데 의사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면 3개의 키(아파트·자동차·병원)를 준비해야한다.
60, 70년대 자산가들의 사윗감으로 인기 높던 미국박사도 여전하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급 신랑감들이 고도의 전문직으로 개념이 넓어졌다.
국가고시(사법·행정·외무)출신, 의사, 교수, 해외유학생, 재벌 기업채의 회사원 등으로 안정된 전문직들이다.
인기 있는 신부감의 조건도 60,70년대와는 크게 달라졌다. 종래의 살림 잘하는 현모양처형은 이제 인기가 없다.『외모가 세련되고 맞벌이를 할수 있느냐』는 것이 남성들의 가장 큰 요구조건이더라고 김혜주씨는 얘기한다.
직업이나 전공도 종래의 교사·약사에 이어 해외 진출이 늘어난 간호원, 그리고 음대와 미대 출신으로 확대되고 있다. 예능 전공자는 가정 분위기를 정서적으로 이끌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 레슨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실제로 83년 직업적인 걸혼상담소인 한국가정문제연구소(원장 신혜영) 가 결혼 적령기의남녀 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배우자 선택조건 결과는 이상의 시중 소문을 뒷받침하고 있다.
73%의 남성들이 맞벌이에 찬성했으며 남녀 모두 배우자의 기본조건으로『보기 좋은 외모』와『장래성 있는 전문직』을 꼽았다. 그밖에도 여성이 원하는 조건으로는『아파트 소유』『시부모 안모시기』『키 1백70∼78㎝』등. 남성 역시『키 1백58㎝이상 날씬한 몸매』 『경제력』등이다.
이렇게 결혼할 상대에게 원하는 조건들이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되니까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조건에 맞는 상대를 구할 수 있는 직업적인 중매꾼이 필요해진다.
직업 중매꾼들이 엄청난 소개료와 과잉혼수·과잉예단을 조장하는 장본인중의 하나라는등의 갖은 폐해가 논의되지만 정작 재산있고 지체있다는 층에서 오히려 이런 중매꾼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녀들이 커지면 일찍부터『엉뚱한 연애해서 손해보지 말고 중매로 부모가 택해주는 조건에 맞는 상대와 결혼하라』고 교육시키는 가정 또한 적지않다는 것이 가정주부 윤명희씨(42· 서울강남구서초동우성아파트) 의 얘기다.
이렇게 조건과 조건의 만남인 결혼이니만큼 상대방의 조건에 상응하는 혜택(?)을 내세워야하기 때문에 능력이상의 과잉혼수·과잉예단등의 사회적인 병폐가 생겨난다는 것이 윤남경씨의 얘기다.
서울의 어지간한 중산층이면 딸을 시집보내는 기본비용이 1천만원선. 좀 더 나은 조건의신랑이면 아파트,5백만원대의 손목시계, 명주 솜이불 (싯가50만원),시어머니 밍크코트(싯가7백만원) 등의 엄청난 혼수와 예단이 등장하는 무리와 난센스를 빚는다는 것이다.
중매아닌 연애에도 이러한 병페적 결혼풍조가 예외는 아니어서 이른바 괜찮은 조건의 신랑집에서는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엄청난 예단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딸이 의대생과 6년 연애끝에 결혼날짜를 잡으니까 시어머니 될 분이 아이를 불러 1천만원짜리 장농을 예단으로 요구해요. 집안형편을 아니까 딸은 울고불고 파혼한다고 난리였지만 1천만원에 딸아이 일생을 망칠수는 없어 엄청난 무리를 했읍니다』고 한 어머니는 술회한다.
이렇게 혼수로 인한 무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사회 각층에 깊게 번져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85년 상담건수 총 1만1천8백51건중 약10%가 파혼및 남녀관계에 관한 것.
그중 절반이상이 혼수 또는 상대방의 결혼조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혼수가 부실하면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탄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요. 물질만능주의가 이 사회에 팽배한 최근 10년간의 두드러진 경향입니다』고 차명희간사는 얘기한다. <박금옥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