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단간방서 학생1명으로 출발 5만4천명 배출…여대의 대명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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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근세 한국 여성 신교육의 요람 이화여대가 86년으로 창립 1백주년을 맞았다. 미국 북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가 한국에 파견한 선교사「메리·F·스크랜톤」부인이 황화방 (오늘의 서울정동)작은 골목안 단칸방에서 단 한사람의 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것이 오늘의 이화학당. 꼭 1세기만에 이화는 졸업생 5만4천8백86명을 배출했고, 3개 대학원과 11개 단과대학 54개학과에 총1만9천여명의 재학생을 가진 세계최대의 여자대학으로 성장했다. 신여성교육의 요람인 이화의 과거와 앞으로의 진로, 그리고 기념사업의 개요등을 알아본다.
한국사회가 사대주의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10세기말엽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가 탄생되었다.
1886년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시키기 위해 이땅에 온 푸른눈의 여성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초창기엔 숙식도 제공>
초창기의 이화는 학비·침식·의류까지가 보장되던 완전 장학제였지만 집안 깊숙이 묻혀있는 규수들을 학생으로 유치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양인이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눈을 빼고 잡아먹는다든가 미국으로 데려간다는 등의 장안에 널리퍼진 흉흉한 소문때문이었다.
최초의 학생 조별단은 호열자에 걸려 성문밖에 버려진채 죽어가던 한 여인의 가슴팍을 파고들던 그의 어린딸이었다. 선교사들은 서약서를 써주기도하고 종으로 팔려가는 소녀의 몸값을 치르면서까지 학생을 모집해야했다.
10세미만에 학당에 들어와 10여년이 지나 성년이 되면 결혼하여 기숙사를 떠나는데 선교사들이 혼처를 마련하고 혼수도 해주며 구식 결혼까지 올려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화에서의 서양식 민주주의 교육, 기독교 교육은 우리여성을 「이상은 높게, 기개는 활발히, 매무새는 멋장이」 인 이른바 「신여성」 으로 키웠다.
초창기 수줍음을 타던 소녀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던 미스「월터」는 신체발육을 저해하는 치마허리를 어깨허리로 고쳐입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한복개량의 첫걸음이었다.
이화학당은 1904년에 중등과가,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가 신설되었다.
1910년에는 다시 대학과를 신설하여 여성지도자를 키울 고등교육기관으로의 터를 닦았다.
드디어 1914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대학졸업생으로 김앨리스·신마실라·이화숙씨를 배출했다.

<46년에 종합대학 승격>
1929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분리시켰고 35년에는 신촌에 새교사를 짓고 이사, 37년에는 최초로 한국여성인 김활난씨가 교장에 취임했다.
해방후인 46년 마침내 이화는 종합대학이 되었고 총장도 김활난·김옥길에 이어 오늘의 정의숙씨로 이어진다.
일제말기인 40년대 이화는 최대의 시련기를 맞았다. 일제는 이화에서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몰아냈고 교명조차 잠시나마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바꿨다. 미국기독교재단의 재정지원이 끊겨 애를 먹기도했다.
이화가 배츨한 인물들은 곧 이땅의 선구자였다.
1900년 미국 웨슬리언대학에서 한국여성으로는 최초의 BA학위를 받고 귀국한후 이화에서 가르치던 하난사씨는 일제탄압이 시작되자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독살되었다.
미국볼티모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최초의 서양의술을 익힌 여의가되어 귀국한 박에스터씨는 나귀를 타고 전국방방곡곡을 돌며 의료봉사를 하다 전염병을 얻어 별세했다.

<메이퀸 대신 동창여왕>
10대의 어린나이로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고 모진 고문끝에 목숨을 잃은 유관순열사도 이화가 키운 인물이다.
1918년 이화학당의 대학과 제5회 졸업생인 김활난씨는 30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으로 한국의 첫 여성박사가 되어 금의환향, 당시 이 나라의 상징적인 신여성이 되었다.
5월이면 새로 뽑힌 메이퀸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메이 퀸은 재색을 겸비한 일등 신부감으로 인기가 높았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78년 중지되고 대신 졸업생중 동창여왕을 뽑아 대관식을 하는것으로 바뀌었다.
이화인에게는 뒷말도 많았다.
「사치하다」는 비난도 받고 6·25 수복후에는 박인수 사건등 스캔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최근에 이르러 이화인의 사회적인 역할과 학문적인 성취등이 기대보다 미흡하다는 자성의 소리가 있다. 이제 이화는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간접적인 역할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할 시대적 요구앞에 서있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한때 남녀공학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이화여대 안에서는 이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된적은 없다.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으로서의 긍지와 특성을 살러가며 여성 전문인력을 키운다는 방침 그대로를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대대적 기념행사 준비>
창립 1백주년을 앞두고 이화여대는 학교측·동창회측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있다(5월25∼31일).
2000년대의 이화를 원대하게 구상해보는 것이라고 최병욱기획조정실장은 얘기한다.
학교당국은 이미 이화 1백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정의숙)를 구성하여『이화 1백년사』 발간·기념학술대회·기념건물 봉헌·논문집 발간등의 계획을 수립하여 진행시키고 있다. 그밖에도 기념 영화제작· 화보집 발간등이 있고 기념사업과 관계된 모든 책자·문서·포스터등에 사용할 상징인 휘장도 정했다.
한편 동창회측은 지난해 4월 창립1백주년 기념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이화 동창을 대상으로한 문학작품 모집·원로졸업생을 상대로 한 이화시절 수기모집·5만동창주소록 발간·1백만 장서모으기·캠페인등이 동창의날 기념행사(5월28일)와 함께 진행된다고 이병임 이화여대총동창회장은 밝힌다. <박금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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