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이 배후로 지목한 귈렌 “정부의 자작극” 역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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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훌라흐 귈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의 배후로 정적 펫훌라흐 귈렌(75)을 지목하고 미국 정부에 “귈렌을 미국에서 추방하거나 터키로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귈렌이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포코노스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16일(현지시간) “터키는 그동안 미국이 요구한 테러리스트 추방 요구를 거절한 적이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집권 도운 동지서 11년 만에 정적
미 언론이 선정한 세계적 지성 귈렌
자신이 장악한 사법부 등 동원해
2002년 총선 에르도안 승리 도와
내각 부패 수사 놓고 2013년 파경
에르도안, 미국에 “귈렌 내놔라”

비날리 일디림 터키 총리도 “귈렌을 돕는 나라는 터키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며 강한 어조로 미국을 압박했다. 술레이만 소이루 터키 노동장관은 한발 더 나아가 “이번 쿠데타 뒤에 미국이 있다”는 주장까지 폈다.

귈렌은 “민주주의는 군사행동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고 이번 쿠데타 시도를 비판하며 자신은 이 사건과 관련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이날 기자들을 만나 “국제사회가 에르도안의 주장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번 쿠데타는 내 지지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연출된 자작극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귈렌은 199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로 건너간 이래 줄곧 그곳에서 살고 있다.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표면상의 이유는 지병 치료였지만 당시 세속주의 민주좌파당(DSP) 정권이 귈렌을 반세속주의 혐의로 기소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사실상 망명했다는 게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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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현지시간) 군부 쿠데타 소식에 거리로 뛰쳐나온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자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군인을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이스탄불 AP=뉴시스]

터키 내 이슬람의 부흥을 꾀했던 귈렌은 2002년 세속주의 정당에 맞서 친이슬람 성향인 에르도안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정치적 동맹이었다. 귈렌은 70년대부터 자신이 조직한 사회단체 ‘히즈메트(봉사)’를 통해 터키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나 2013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고 귈렌파 숙청에 나서면서 그의 최대 정적이 됐다.

귈렌은 2008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선정한 ‘세계 최고 100대 지성’ 독자 투표에서 노엄 촘스키, 리처드 도킨스 등 세계적인 학자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이슬람 사상가다. 그는 터키 전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졸업생들을 언론·경찰·사법부의 요직에 앉히는 방법으로 터키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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귈렌은 에르도안이 창당한 정의개발당(AKP)이 2002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귈렌은 자신이 장악한 사법부와 경찰, 언론의 힘을 총동원해 AKP를 지원했다. AKP가 이 선거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해 에르도안은 총리가 됐다.

귈렌과 AKP의 협력 관계는 200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2011년 에르도안이 3선에 성공하며 안정적인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하자 두 세력의 동맹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터키의 저술가 무스타파 아키욜은 “2011년 무렵부터 귈렌파인 사법부·경찰과 AKP 사이에 종종 충돌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두 세력의 동맹이 완전히 깨진 것은 2013년 말이다. 11월 에르도안이 히즈메트가 운영하는 터키 전역의 종교학교 4분의 1을 폐쇄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다음달인 12월 귈렌파인 터키 경찰은 정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부패 수사를 실시해 내무장관 아들 등 정부 주요 인사 및 관계자 24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했다.

에르도안의 두 아들 빌랄과 부락이 부패에 연루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에르도안은 수사 개시를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스탄불 경찰청장 등 경찰 고위 간부 70여 명을 해임 또는 전직시키며 맞섰다. 이 같은 추문에도 불구하고 AKP는 이듬해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귈렌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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