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82] 국민당 정부의 민심 외면 쌓이면서 2·28 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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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김명호]

2·28 사건은 우연이 아니었다. 50년에 걸친 일제(日帝)의 대만(대만) 통치 후반기는 수탈과 거리가 멀었다. 대만을 남진(南進) 거점으로 삼기 위해 공업·전력·교통·항만시설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고구마처럼 생긴 섬은 물산도 풍부했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탐낼 만한 섬이었다.

친일파 천이 행정장관의 무능력에

일제 시절보다 더한 관원들 부패

중국어 못하는 현지인 개 돼지 취급

1943년 11월 말, 카이로에 모인 루즈벨트와 처칠, 장제스는 대만의 중국 귀속에 합의했다. 장제스는 귀국과 동시에 대만 접수 준비를 서둘렀다. 행정장관(行政長官)으로 파견할 사람을 숙고했다. 천이(陳儀·진의)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대만 간부 훈련반을 신설하고 천이를 주임에 임명했다. 측근들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군사 지식이 풍부하고 정치력이 볼만하다. 사상도 흠잡을 데 없다. 일본에 정통하고, 대만 사정에도 밝다. 푸젠(福建)성 주석을 오래 역임하다 보니 푸젠에 기반이 단단하다. 대만은 고산족(高山族)을 제하면 푸젠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대만을 잘 모르고, 대만도 중국을 잘 모른다. 천이가 적격이다.” 찜찜한 부분도 실토했다. “고위 공직자일수록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보다 영악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부려먹기 쉽다. 천이도 사람이다 보니 흠 투성이다. 너무 청렴하고 아랫사람 거짓말에 잘 넘어간다. 치부했다는 소문은 천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소리다.”

천이에 관한 미국 외교관의 기록을 소개한다. “장제스보다 다섯 살 많다. 같은 저장(浙江)성 출신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상하이의 비밀결사에 가입하는 등 비슷한 점이 많다. 푸젠성 주석 시절 반(反) 장제스 세력을 축출하고 현지의 재정을 농단(壟斷)했다. 일본 고위 관리, 기업인들과 친분이 두텁다. 이들의 잇속을 챙겨주며 자신도 치부했다. 부인은 일본의 게이샤 출신이다. 부인과 사별했다는 말에 속아서 천이와 결혼했다고 한다. 중일전쟁 발발 2년 전인 1935년, 대표단을 이끌고 대만에 간 적이 있었다. 일본의 대만 통치 40주년을 축하하며 일본 정부의 대만에 대한 공로에 경의를 표했다.

77사변(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에도 푸젠성의 반일 운동을 진압하며 일본과의 왕래를 그치지 않았다. 대만의 명망가 중에는 푸젠성의 괴현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천이는 일본에 투항한 국민정부 2인자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와 한통속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전시 수도 충칭(重慶)으로 소환됐다. 장제스의 신임은 여전했다.”

천이는 푸젠과 광둥(廣東) 출신 관원들을 선발했다. 대만과 인접한 샤먼(廈門)의 명문 샤먼대학과 지메이학교(集美學交)에 우수한 학생을 추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일본 패망 후, 대만을 접수한 천이는 일제가 남긴 재산 접수에는 성공했지만, 인심(人心)은 접수하지 못했다.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국민당은 일본이 대만에 비축했던 물자들을 대륙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장관 공서(公署) 관원들의 추태는 잔칫상 받은 걸인들보다 더했다. 천이 본인만 청렴했지 관원들의 부패는 일본 통치시절보다 더했다. 타이베이를 비롯한 대도시의 물가가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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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김명호]

학생들도 불만이 많았다. 대륙에서 온 교사들은 중국어 못하는 학생들을 개 돼지 취급했다. 온 종일 모아놓고 국가(國歌)만 부르게 했다.

발음이 조금만 틀려도 두들겨 팼다. 학원가에 노래 한 곡이 유행했다. “총독의 위풍은 견딜 만했다. 장관의 흉악함은 감당하기 힘들다. 늑대 떠난 자리에 호랑이가 들어앉았다. 지옥에서 탈출하니 불구덩이가 있을 줄이야. 우리는 조국을 잊은 적이 없었다. 조국인지 뭔지는 어디에 있는지, 사방을 둘러봐도 찾을 길이 없다.” 대륙과 대만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온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르며 저주했다.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대형 사건의 원인은 간단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료들의 자부심과 특권의식, 이상주의자에게 부여한 요상한 권한 때문이라고 단정해도 된다. 2·28 사건도 마찬가지다. 충칭에서 파견한 접수 관원들 대다수가 유아독존(唯我獨尊)이었다. 행정장관 공서를 천이회사(陳儀公司)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구호만 그럴듯하고 성의가 없었다.

주둔 부대 일부는 대륙에서 급조한 부대였다. 엄격한 훈련을 거치지 않은 보충병들이라 군기가 엉망이고 밖에만 나오면 별짓을 다하고 다녔다. 북방 출신들은 말로만 듣던 바나나 맛에 혼이 빠졌다. 양손에 바나나 들고 다니며 부녀자들을 희롱했다. 접수 요원 중에 항일 영웅이나 진정한 애국자는 극소수였다. 국가 이익은 도외시한 채 금덩어리·여자·주택·승용차에만 집착했다.

대만인들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지식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처절한 희생을 감수했던 50년간의 대일 투쟁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공산당의 사주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대만 공산당은 일부 지역 외에는 2·28이라는 대규모 항폭(抗暴)을 펼 만할 능력이 없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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