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경의 Shall We drink] <24>핀란드의 하얀 밤과 맥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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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처럼 환한 저녁, 자작나무가 있는 헬싱키의 해안도로 풍경.

“거짓말! 백야에도 오로라가 있다고요?”

“당연하죠. 오로라는 사계절 하늘에 있어요. 단지, 여름엔 백야에 가려서 안보일 뿐이에요.”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Helsinki)에서 만난 핀에어(Finnair) 여행 서비스 담당자 안씨(Anssi)는 백야(White night)에 대한 편견을 단번에 깨줬다. 시종일관 밝은 표정과 유쾌한 말투로 핀란드인은 무뚝뚝하다는 편견도 산산조각 내줬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오로라를 보고 자라, 가끔 헬싱키의 하늘에서 오로라를 보면 몹시 반갑다고 말할 때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오랫동안 오로라의 기운을 받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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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일요일 저녁의 헬싱키.

백야란 위도 48도 이상, 북극에 가까운 지역에서 여름철 일몰과 일출 사이 밝은 상태가 계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핀란드에선 헬싱키는 물론 라플란드처럼 북쪽으로 갈수록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하얀 밤’이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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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에서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여유로워 진다.

백야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여름이 내린 축복이다. 여름에는 몸도 쉽게 피곤해지지 않고, 잠을 적게 자도 활력이 넘친단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들은 결혼식, 파티도 여름에 가장 많이 한단다. 밤 9시, 안씨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창밖은 여전히 환했다. 해가 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하늘을 흘깃거리며 아르니(Aarni)란 핀란드 호밀 맥주를 홀짝였다. 혹시 저 창 너머에 보이지 않는 오로라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핀란드 사람들은 이토록 하얀 밤 무얼 하며 보낼까 궁금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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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투르쿠의 아우라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핀란드에서 4일 밤을 보내보니 백야의 핀란드에서 보내는 일상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낮에는 야외에서 미트볼이나 생선요리에 맥주를 마셨고, 대낮처럼 환한 밤이면 아무리 맥주를 마셔도 해가지지 않음을 실감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공원은 아침부터 밤까지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가까이에서 보면 풀밭 위의 음주나 독서 또는 둘 다를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노천카페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사람도 많았다. 하나같이 내게 주어진 여름을 아낌없이 보내리라 작정한 표정이었다.

작정하고 백야를 즐기는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맥주는 ‘곰’이란 뜻의 카르후(Karhu)다. 핀란드의 아이콘 중 하나인 곰을 라벨에 그려 넣은 페일 라거(Pale Lager)로 살짝 구운 토스트처럼 구수한 맛이 나면서도 목 넘김이 청량해 여름 날씨에 잘 어울린다.

헬싱키에서 여름철에만 ‘펍 트램(Pub Tram)'을 운영하는 코프(Koff) 맥주도 인기다. 라플란드에 뿌리를 둔 라핀 쿨타(Lapin Kulta)도 가볍게 벌컥벌컥 들이키기 그만이다. 이밖에도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 산델스를 기리는 맥주 산델스(Sandels), 라거에서 포터까지 풍부한 스펙트럼을 뽐내는 올비(Olvi) 등 핀란드 맥주 종류도 꽤 다양하다. 해가 지지 않는 긴긴밤을 보내려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흰 건물과 녹색 돔형 지붕이 돋보이는 헬싱키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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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의 아이콘, 헬싱키 대성당(Helsingin Tuomiokirkko) 가는 길의 ‘부뤼게리 헬싱키(Bryggeri Helsinki)’처럼 직접 양조를 하는 브루어리펍도 하나 둘 생겨나는 추세다. 브뤼게리 헬싱키의 아담한 정원에 앉아 써머 에일(Summer Ale)을 마시다가 헬싱키 대성당 앞 광장에 가면 갓 결혼한 신랑 신부를 만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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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어리펍, 부뤼게리 헬싱키 직접 만든 맥주 써머 에일.

한데, 핀란드 사람들은 무얼 마시느냐보다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에 집중하는 듯했다. 날씨가 좋으면 무조건 야외로 나간다. 자작나무 아래를 지나 해안도로를 거닌다. 배를 타고 가까운 섬으로 가거나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강변이나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 차가운 맥주나 스파클링 와인을 홀짝인다. 물가에 있건 숲 속에 있건 한 잔의 술은 여름날의 싱그러운 풍경을 음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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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지 않는 핀란드의 여름, 비가 오면 무지개가 자주 뜬다.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핀란드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때때로 소나기를 뿌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핀란드 사람들은 요란 떨지 않고, 조용히 비를 피해 해가 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4일 밤의 핀란드 여행 중 마지막 백야를 맞이하던 날도 갑자기 비가 내렸고 잠시 후 거짓말처럼 해가 났다. 비 내린 후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 위로 무지개가 떴다. 낮처럼 환한 밤 발트해 위로 뜬 무지개를 바라보며 일행들과 잔을 부딪쳤다. 핀란드의 하얀 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기억날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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