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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렉시트 정치의 이면과 시사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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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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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전 재무장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은 영국인들이 했지만, 그것은 글로벌 충격이었다’. 어느 외신의 논평이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을 뒤로한 지 오래된 영국은 현재 세계 경제의 4% 수준(미국 약 25%, 중국 약 15%)에도 못 미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종주국으로서 세계 속 영국의 위상과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하다. 특히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적 세계 경제 질서 창출과 유지에 미국과 함께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그리고 영국 스스로 이 세계 경제 질서의 이점과 세계화의 장점을 잘 활용해 큰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민은 개별 국가 차원에서 관리 가능한 수준이어야 하고
세계화도 피해 계층 배려하면서 적절한 속도로 추진돼야

그래서 기존의 세계 질서와 세계화 추세에 역행하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에 세계가 크게 놀란 것이다. 브렉시트의 경우 오랜 기간에 걸쳐 영국이 겪어야 할 경제적 고통과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는 많은 경제학자와 정책 담당자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 경제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색하게 한 것이어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이런 사태가 영국에서 벌어지게 됐으며 그 시사점은 무엇인가.

문제의 발단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자체에 있다. EU 탈퇴에 따른 영국의 손익 계산은 비단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측면을 종합적으로 긴 안목에서 고려해야 하는 복잡하고 분야별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직 연임에 급급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 문제를 단순한 찬반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임시방편의 선거공약으로 내건 것이 화근이 돼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총리직마저 포기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캐머런 총리는 영국 사회, 특히 세계화의 그늘에 있는 근로자 계층에 널리 퍼져 있는 반이민, 반세계화, 강한 정부 불신 등 현실 부정적 국민 정서가 브렉시트 지지의 온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한 정치적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엘리트 정치인’이란 오명마저 쓰게 됐다. 반면에 국익보다는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앞세운 일부 인기영합 정치인은 이러한 국민 정서를 사후에 감당도 못할 브렉시트 지지 쪽으로 백분 활용했다. 특히 그들은 영국 국민의 이민에 대한 거부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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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석]

실제 최근에 영국으로 유입된 순이민은 갑작스레 늘어나(2015년에는 정부의 당초 추산보다 세 배가 넘는 33만 명) 영국 국민 상당수가 자기들의 사회·문화적 질서와 규범이 이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가까운 시일 내에 인구가 많은 터키가 EU에 들어오게 돼 있어 이민이 더욱 크게 늘어날 것이란 거짓 루머까지 퍼뜨려 이민에 대한 영국인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이에 일부 정치평론가는 브렉시트를 ‘공포가 이성을 이긴 결과’ 혹은 ‘감정이 경제적 논리를 제친 결과’로 규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돌풍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EU 내의 이민도 개별 국가 차원에서 관리 가능한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민뿐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따른 세계화도 그 혜택의 적절한 배분과 피해를 보게 된 근로자와 기업에 대한 구제 및 보상 대책과 함께 적절한 속도로 추진돼야 한다는 것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거시적·총량적 차원에서 아무리 좋은 세계화도 미시적 차원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과 계층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을 경우 언젠가는 사회·정치적 큰 반발에 부닥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그동안 급속히 추진돼 온 세계화에 소외되거나 피해를 본 국민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어 균형 있는 세계화 정책이 더욱 시급하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드러난 전문가, 특히 정책 담당자와 경제전문가들에 대한 일반 국민의 강한 불신과 거부감도 이들의 주 관심이 세계화의 그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근로자와 기업 그리고 세계화 혜택의 배분보다는 거시 경제 차원의 분석과 정책 건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경제전문가와 정책 담당자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다.

이제 새로 취임할 테리사 메이 총리는 본인의 당초 소신과 관계없이 영국 국민이 쉽게 택한 브렉시트를 적어도 앞으로 2년에 걸쳐 EU와 어려운 협상을 이끌어야 한다. 또 다른 차원의 어려운 정치가 영국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 분명하다.

내용이 복잡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국정 이슈가 나올 때마다 쉽게 국민투표 운운하는 정부나 우리 정치권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유용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전 재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