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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나의 힘] 먼저 간 동료 '業'지고 산에 오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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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산악인 엄홍길(43)씨와 함께 도봉산에 올랐다. 비지땀을 흘리며 비탈진 산길을 한시간가량 오르니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망월사가 보인다. 엄씨가 하루 건너꼴로 찾는 곳이다.

엄씨에게 도봉산과 망월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신 같은 존재다. 세살 때부터 그가 사계절 뛰놀았던 도봉산은 영원한 수련장이요, 어머니 손을 잡고 다녔던 망월사는 마음의 고향이다.

"어려선 원망도 컸어요. 서울이 지척인데도 고등학생 때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구석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철 들고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정말 선택받은 행운아였던 거죠. 오늘의 저를 만든 건 1백% 도봉산입니다."

엄씨에게 산과 불교는 동의어다. 어린 시절 초파일만 되면 떡과 밥을 먹으러 갔던 망월사는 현재의 그를 떠받치는 부처 같은 장소다. 산에 가야 모든 게 진정되고, 절에 가야 흩어진 자신을 추스른다는 것이다.

*** 나를 만든 건 100% 도봉산

지금은 도봉산을 떠나 서울 창동에 살고 있으나 갑갑해 견디기 힘들다고 '엄살'을 피웠다.

그가 법어 같은 말을 뱉었다. "산이 있으므로 제가 존재하고, 제가 있으므로 산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산에 갑니다. 제가 산이고 산이 곧 저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성철 스님의 법문을 흉내낸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밥 먹듯 넘나든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말이다.

"처음엔 정상에 우뚝 서야겠다는 욕심에서 산을 탔습니다. 성공한 산사나이가 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과욕은 항상 재앙을 불렀습니다. 동료들의 희생이 너무 컸던 거죠. 특히 8천m가 넘는 고산 등정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오를 수 없죠."

사람들은 엄씨의 화려한 겉모양만 주목한다. 2000년 한국, 나아가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그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낯빛은 밝지 않다. 오히려 참회하는 듯하다.

*** 동료 희생 뒤 불교 큰힘 돼

1986년 에베레스트에서 추락사한 셰르파 술딤 도루지, 93년 시샤팡마에서 사망한 후배 박병태씨 등 모두 여덟명의 산악인을 그의 무리한 정복욕 때문에 잃었다고 씁쓸해했다.

"산을 우습게 보고 덤벼들었죠.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라는 걸 알지 못했어요.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산에 대한 예의를 배웠습니다. 아무리 체력.정신력이 강인해도 정상에 오르는 건 아닙니다."

그때 불교는 큰힘이 됐다. 산과 사람은 둘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욕심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마음에 새겼다. 설산(雪山) 깊은 곳 텐트 머리맡에 염주와 작은 불상, 그리고 코끼리상을 두기 시작한 것도 93년부터다.

98년 네번째 안나푸르나 등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게 그의 심지를 굳힌 결정적 계기였다. 산에 오르는 것, 그건 이제 그에게 욕심을 줄이는 것과 통한다.

어리석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산을 포기하면 되지 않을까. 아직도 욕심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돌아오는 대답은 명확했다.

"업이죠, 업…. 먼저 간 사람들의 미소 뒤에 흐르는 원망의 눈초리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 대한 죄책감을 등에 지고 산에 가는 겁니다. 가족을 생각하면 당장 그만둬야죠. 앞으로 보탤 명성이 얼마나 더 있겠습니까. 맛난 음식이나 좋은 자리에 있으면 저세상의 동료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는 또 배낭을 꾸리고 있다. 다음날 15일 히말라야 위성봉(8천m 이상이면서도 주봉으로 인정받지 못한 산) 로체샤르로 떠난다.

*** 93년부터 불상 품고 등반

지금까지 열한 명이 14좌를 완등했으나 '14+1'은 세계 최초란다. 하산 길, 그가 옆길로 샜다. 뒤따라 가니 93년 사망한 박영태씨의 추모비가 눈에들어왔다. 도봉산 산행의 필수 코스다. 삼배를 올리는 엄씨. "도봉산 산신, 히말라야 산신, 관세음보살에게 명복을 빌어요. 그가 차가운 눈밭에서 따뜻하게 쉬도록 말이죠."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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