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2)로마대회 출전준비-제84화 올림픽 반세기(3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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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60년은 제17회 로마올림픽(8월25일∼9월12일)이 열리는 해. 그런데 4·19혁명은 우리체육계에 뜻하지 않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폭발한 민중의 함성은 이승만 자유당정권에 종말을 가져왔다. 대한체육회 회장·KOC위원장으로 8년동안 체육계를 대표해온 이기붕 (3·15선거로 부통령 당선)은 4월28일 일가족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1월 정기총회에서 아시안게임(5회) 유치, 체육회관 건립계획 등을 결의하며 의욕적으로 스포츠 진흥책을 져나가려던 체육계는 졸지에 지도자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 또 급변하는 사회정세는 눈앞에 다가온 올림픽을 앞두고도 속수무책이었다.
5월21일 체육회는 제1차 임시평의원총회 (대의원총회)를 열고 집행부의 일괄사표를 수리,체제개혁의 의지를 보였다.
임시총회는 체육회의 공백기간에 시급한 문제인 올림픽 파견·전국체전·정관개정 등을 맡을 13인의 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수습위원회는 경기단체 6명, 지방대표 3명, 집행부·재야인사·학교단체·문교부 각1명씩으로 이뤄졌는데 l개월시한부 직책이었다.
나는 그 전해인 59년 1월 정기총회에서 처음으로 경기담당 이사로 선출돼 대한체육회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수습위원회엔 짐행부 대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선 하루빨리 집행부가 구성돼 체육회가 정상화되길 바랐다.
그러나 6월18일 열린 2차임시평의원총회에서는 이사 선임을 놓고 심야까지 논란을 벌인 끝에 각 경기단체별로 1명씩, 모두 38명이 선출되는 난맥상을 빚었다. 이로인해 이사들이 감론을박으로 집행부 구성에 합의하지 못하고 결국 총사퇴하는 소동을 빚고 말았다.
이같은 와중에서 KOC 이상백부위원장과 장기영위원 등 뜻있는 인사들은 올림픽 출전문제를 더 미룰수 없다며 동분서주했다. 대표선수 선발을 위한 5인위원회의 책임을 맡았던 나는 각 경기단체로부터 자료를 제출받아 대한중우사무실에서 작업을 계속했다.
7월2일엔 제3차 임시평의원총회가 열려 체육회 집행부 구성문제는 일단락됐다. 회장엔 전외무부장관인 변영태가 무투표로 당선됐고 부회장엔 이철승·이병학이 뽑혔다. 이사는 15명으로 줄이기로하고 투표한 결과 나도 그중의 1명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변영태가 회장 취임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철승부회장이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회장직무를 대행하게 됐다 (이철승은 다음해인 61년 1월 정기총회에서 체육회 회장으로 정식 당선됐으나 5·16혁명으로 5개월의 단명에 그쳤다).
체육회는 지난 멜번올림픽 선수선발과정에서 KOC와 마찰을 빚었던 경험이 있어 이번 로마올림픽은 KOC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에따라 KOC의 이상백·장기영·이원순·「월터 정」등 원로들은 선수단 규모를 놓고 5인위원회에서 마련한 1안(30명)과 2안(런던대회 규모)을 검토한 끝에 2안을 채택했고 체육회 집행부에서도 이에 동의했다.
결국 선수단은 임원 20명, 선수36명 등 56명과 심판·회의대표·연구원 11명을 포함한 67명으로확정됐다. 출전종목은 육상·역도·권투·레슬링·사이클·사격·체조·다이빙·승마등 9개 종목으로 체조와 다이빙은 올림픽 첫 출전이었다.
단체종목으로 기대를 걸었던 축구는 극동예선에서 일본을 격파했으나 자유중국과의 2차전 경기(1차전은 2-1로 승리)에서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다 몰수패를 당하는 바람에 출전이 좌절됐었다. 또 농구는 국제무대에서의 실력차를 시인하고 출전을 포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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